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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1950년 6월 1일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에 최초의 정규 4년제 생도 334명이 입교했다. 그러나 불과 24일 뒤 6·25가 터지면서 이들은 전장으로 내몰렸다. 계급도 군번도 없이 소총수로 투입됐고, 살아남은 이들마저 단기교육을 거쳐 소위로 임관한 뒤 다시 포화 속으로 향했다. 전사·실종자만 132명에 달했던 비운의 기수, '생도 2기'다.

(서울=연합뉴스) 박창기 기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육사연병장에서 열린 육사 11기 임관 40주년 행사에 참석한 후 걸어나오고 있다. 1995.10.7 (끝) <저작권자 ⓒ 2009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생도 2기들이 전장에서 피를 흘리는 동안 육사 11기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1월 입교한 이들은 후방인 경남 진해에서 미국 육사(웨스트포인트)를 모델로 한 4년 과정을 온전히 이수했다. 전쟁의 참화를 비켜간 덕에 군내에서는 '억세게 운 좋은 기수'라는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런 육사 11기를 더욱 특별한 기수로 만든 것은 강한 결속력이었다. 생도 시절 전두환·노태우·김복동의 이름을 딴 '김태환회'로 시작한 소모임은 임관 후 칠성회로 이어지고 군내 사조직 하나회로 발전했다. 노태우가 김복동의 여동생인 김옥숙과 결혼하면서 11기는 동기를 넘어 사돈으로까지 얽혔다.
동기애를 발판으로 육사 11기는 권력의 정점으로 치달았다. 그 중심에는 전두환이 있었다. 5·16 직후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해 박정희의 눈에 든 그는 11기의 선두주자이자 하나회의 리더로 먼저 별을 달았고, 노태우를 비롯한 동기들을 요직으로 끌어주며 세력을 키웠다. 전두환이 먼저 길을 열면 노태우가 뒤를 따랐다. 노태우는 전두환이 거쳐간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와 보안사령관을 뒤이어 맡았고, 마침내 전두환의 후계자로 대통령 자리까지 물려받았다.
노태우 못지않게 전두환과 가까웠던 동기가 정호용이었다. 하나회 서열 3위로 불린 그는 대통령이 된 전두환에게 사석에서 "두환아"라고 부를 만큼 막역했다. 12·12 사태 당시 대구의 50사단장으로 반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전두환 덕에 특전사령관이 됐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으로 예편한 뒤 내무, 국방장관을 지내고 금배지까지 달았다.

30일 오전 5.18 내란행위와 관련, 정호용 의원이 검찰의 조사를 받기위해 서울지검 청사를 들어서며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이희열
//1996.1.30(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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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용이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하나회 '빅3'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정호용은 5·18 당시 특전사령관이었지만 자신에게 광주 진압부대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없었고 현지 방문도 군수지원 등을 위한 것이었다며 발포 명령 혐의를 줄곧 부인했다. 결국 그의 죽음으로 누가, 어떤 경위로 발포를 명령했는지는 미제로 남게 됐다.
육사 11기의 정치군인들은 권력뿐 아니라 막대한 부까지 거머쥐었다. 법의 단죄를 받고도 곧 사면됐고 대부분 천수를 누렸다. 전쟁을 피한 데서 시작된 이들의 행운은 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진 셈이지만, 헌정질서 파괴의 장본인이라는 불명예는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억세게 운 좋은 기수'로 출발해 '오욕의 기수'로 남는 것, 그것이 육사 11기의 운명이다.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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