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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윤심덕의 '비극적 서사'…'사의 찬미' 100년의 변주

입력 2026-08-30 0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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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소프라노 윤심덕이 불러 대히트…김우진과 미스터리한 죽음에 화제


대중음악 확산의 결정적 기폭제…"음반 판매 1만3천장, 축음기 보급에도 영향"

영화·연극 등 K-컬처 100년史 관통한 IP…"강렬한 음악성에 극적 사건 결합해 생명력"




'사의 찬미'를 부른 소프라노 윤심덕

'사의 찬미' 가사지 발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이태수 기자 =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이 부른 대표곡 '사의 찬미'(死의 讚美)가 이달 발매 100주년을 맞았다.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맞물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우리 사회에서 크게 히트했고, 이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확산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당대 흔치 않은 여성 유학파 성악가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는 100년이 지나도록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영화, 연극, 문학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고 재생산됐다. 이는 하나의 지식재산권(IP)이 여러 장르에서 활용되는 'K-컬처'의 원형 모델이 됐다.


◇ 미스터리한 죽음에 유작이 히트곡으로


'사의 찬미'는 1926년 8월 소프라노 윤심덕의 유작으로 발표된 노래다.


윤심덕은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소프라노 발성으로 이 곡을 불렀다.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우리말 가사를 붙였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윤심덕은 원래 3박자였던 곡의 리듬을 4박자로 변형해 한층 애절함과 비감을 자아냈다"고 설명했다.




윤심덕 '사의 찬미' 음반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사의 찬미'가 큰 화제를 모은 것은 윤심덕이 1926년 8월 1일 일본 오사카 일동(日東)축음기주식회사에서 이 곡을 녹음한 뒤 같은 달 4일 귀국하는 배편에서 맞은 의문의 죽음 때문이다.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1897∼1926)은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부관 연락선에서 실종됐고, 사랑 때문에 바다에 몸을 던진 연인의 정사(情死)로 보도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배에서 두 사람이 투신하는 것을 본 목격자가 없어 이 죽음을 둘러싼 진상은 100년이 지나도록 미스터리로 남았다.


윤심덕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음반사는 발 빠르게 대응했다.


음반사 측은 음반에 '결사의 독창'(決死의 獨唱)이란 문구를 삽입하고, 가사지에는 '사의 찬미를 최후로 부르고 창해(蒼海)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소프라노 명가수 고(故) 윤심덕 양'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박 평론가는 "윤심덕의 죽음을 활용해 음반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라며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망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면서 '사의 찬미' 역시 덩달아 화제를 모아 1만3천장이 팔렸다는 신문 보도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사의 찬미'의 히트는 당시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축음기 보급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를 계기로 유행가 또는 속요(俗謠)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듬해인 1927년 라디오 방송국인 JODK 경성방송국 개국과 맞물려 음악은 대중을 더욱 폭넓게 파고들었다.


박 평론가는 "1926년 발표된 '사의 찬미'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유행가·속요)이 확산하는 데 결정적인 기폭제 역할을 했다"며 "물론 이 곡 이전에도 여러 노래와 음반이 발표돼 '최초의 대중음악'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 파급력과 화제성을 고려한다면 '사의 찬미' 100주년은 곧 우리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윤심덕 '사의 찬미' 음반 가사지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윤심덕양의 결사의 절창', '사의찬미를 최후로 부르고 창해에 몸을 던진 조선유일의 소프라노 명가수'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 일제강점기 대중문화 최초 트렌드 된 '사의 찬미'


'사의 찬미'가 초기 한국 대중음악, 나아가 대중문화계에 끼친 영향을 이해하려면 윤심덕이란 개인의 인물사가 당시 대중의 입에 오르내린 과정을 살펴야 한다.


1897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기엔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모친 덕분에 윤심덕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었고, 이러한 집안 배경이 서양음악을 접하는 통로가 됐다.


1915년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도쿄로 떠난 윤심덕은 음악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영화·연극·전통극 등 다양한 공연을 접하며 예술 감각을 넓혔다. 1921년 여름에는 재일 한국인 동우회 순회극단의 일원으로 귀국해 전국 25개 도시에서 순회연주회를 했다. 당시 신문 등 기록은 윤심덕의 독창이 공연 전후에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분위기를 끌어올렸다고 전한다.




'사의 찬미' 녹음을 마친 윤심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일동타임쓰' 출처. 자료 제공 현담문고


1923년 귀국한 윤심덕은 그해 6월 26일 첫 연주회를 시작으로, 1924년 11월까지 활발한 무대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공연은 '신여성', '정통 성악가', '무대 위 존재감'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맞물려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찬사와 함께 전통적 시각에서 진취적인 신여성을 바라보는 비판이 공존했고, 엇갈린 평가 속에서 윤심덕은 '논쟁적 스타'가 된다.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스타성에 미스터리한 죽음을 둘러싼 사건이 더해지며 파급력 있는 콘텐츠가 됐다. 오사카에서 레코드 취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선상에서 일어난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건은 한 스타의 개인적 비극을 넘어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윤심덕의 전성기는 짧았지만, 그의 이름과 '사의 찬미'는 사건이 남긴 잔상과 함께 한국 초기 대중문화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특히 스타의 비극이 문화 트렌드로 소비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는 점에서 한국 대중문화사에 여러 의미를 남겼다.




'사의 찬미'를 재해석한 후대 문화 콘텐츠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지난달까지 특별 전시 '원 테이블: 6. 사(死)의 찬미, 100년의 변주'를 선보였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의 김현옥 학예연구사는 "'사의 찬미'에는 식민지라는 격변의 시대를 주체적으로 살아낸 근대 지식인의 고뇌, 가부장적 관습과 예술에 대한 편견에 맞선 예술가의 삶,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염세적 가사와 곡조, 그리고 동반 죽음이라는 극적인 사건이 입체적으로 맞물려 있다"며 "대중은 단순히 비극적인 사랑이나 자극적인 풍문을 넘어, 그 안에 응축된 시대의 절망과 인간의 욕망에 자신들의 감성을 투영하며 끊임없이 이 서사에 응답했다"고 분석했다.


◇ 끝없는 변주, K-컬처의 원형이 되다.


'사의 찬미'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 광복 이후로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이야기로 바뀌었다. 사실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서사는 영화와 드라마,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계속 살아 움직였다.


'사의 찬미'는 시작부터 단순한 대중가요가 아니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함께 자취를 감춘 뒤 언론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정사'(情死)로 소비했고, 시신과 유서로 알려진 문서 역시 확인이 쉽지 않아 자살설·타살설·도주설 같은 추측이 뒤섞였다. 이런 '미완의 이야기'는 작품으로 옮겨갈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낳는 재료가 됐다.


가장 먼저 트렌드에 편승한 쪽은 영화였다. 1969년 3월 개봉한 영화 '윤심덕'은 1967년 4월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당대 스타였던 문희와 신성일이 윤심덕과 김우진을 연기하며 큰 관심을 받았다. 다만 이 영화의 서사는 상당 부분 허구였다. 사실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대중이 원한 감정의 흐름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연극 '사의 찬미'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연극 '사의찬미' 출연진이 31일 공연을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6.01.31 hyun@yna.co.kr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는 '사의 찬미'가 더 다양한 장르로 옮겨갔다. 라디오·TV·영화에 그치지 않고 연극, 뮤지컬, 오페라 같은 무대에서도 되살아났다. 소설이나 만화로도 만들어졌다.


1988년에는 극작가 윤대성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사의 찬미'가 이혜영 주연으로 초연됐고, 1990년에는 같은 희곡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윤석화 주연의 뮤지컬 '사의 찬미'가 무대에 올랐다. 또 1991년 영화 '사의 찬미'가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과 남녀주연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며 대중의 시선을 다시 끌었다.


최근에는 방송가도 '사의 찬미'에 주목했다. 2018년 방송된 이종석·신혜선 주연의 SBS 드라마 '사의 찬미'는 배우들의 연기로 호평 받았고, 블루레이 제작으로 이어질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연극 '사의 찬미'는 지난해 초연 35주년을 기념해 다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새 무대에선 실종 후 생존한 윤심덕이 파리에서 나혜석을 만났다는 가상의 설정이 추가됐다.




1960년대 부터 2020년대까지 시대별 '사의 찬미' 리메이크 음반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 학예연구사는 "윤심덕, 김우진 두 예술가의 삶과 '사의 찬미'라는 강렬한 음악성에 '기록의 공백'이 더해지며 완결되지 않은 '열린 서사'를 이뤘다"며 "이 서사적 여백이 격동의 시대상과 극적 사건에 결합하면서 영화, 연극, 뮤지컬, 무용, 오페라, 소설 등 저마다의 언어로 끊임없이 변주되는 강력한 생명력을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의 찬미'는 후대 음악인들에 의해 노래로도 여러 차례 리메이크됐다.


1963년 정시스터즈의 '달리는 인생'(부제 '일명 사의 찬미')을 필두로 최양숙(1971년), 최정자(1971년), 이현(1974년), 이채연(1970년), 문주란(1989년), 윤석화(1995년), 한영애(2003년), 이미자(2009년), 화자(2024년) 등이 시대를 이어가며 이 곡을 재해석했다.


포크 싱어송라이터 김정호는 '사의 찬미'를 자신의 음반 석 장에 수록하기도 했다.


ts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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