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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늦깎이 신인 배우 하영(33)이 지난해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로 얼굴을 알렸을 때만 해도 화제성은 크지 않았다. 연기력 평가보다 배우 김정화(43)를 쏙 빼닮았다는 반응이 따라붙는 정도였다.

[KBS 2TV '옥탑방의 문제아들' 갈무리.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다 예술계의 엘리트 코스인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SVA 대학원까지 다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정화 도플갱어'라는 외모의 화제성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후, '의사 집안'이라는 태생이 집중 부각되면서 미모와 학벌, 집안까지 갖춘 '타고난 엘리트 배우'라는 그만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사된 영광 누리기(BIRG·Basking in Reflected Glory)'라고 한다. 1976년 미국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가 제시한 개념으로, 자신과 연결된 집단과 사람의 성공과 명예를 자신의 이미지 향상에 이용하려는 심리를 가리킨다.
BIRG 성향은 한국에서 유독 세다. 자신이 왕실이나 양반 핏줄이고 일제 때 땅 부자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폐지된 지 132년이 지났는데도 혈통 자랑이 멈추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눈에 띄게 달라진 게 있다면, 자랑의 대상이 조상의 신분에서 집안의 자산으로 옮겨졌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 결혼중매 시장에서는 당사자의 학벌과 직업 못지않게 부모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급'을 가르는 주요 척도가 된 지 오래다. 조상 족보에서 벼슬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 직업과 직위, 아파트 등기부등본이 들어선 셈이다.

1918년 12월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하영의 증조부인 친일파 의사 안상호의 가족 사진. <출처:국립중앙도서관>
하영의 조상 문제는 '친일하면 3대가 잘 먹고 잘 산다'는 진리를 다시 소환했지만, 이와 별개로 배우 개인에 대한 평가가 부모와 조상의 스펙에까지 확장되는 현실 역시 혀를 차게 만든다.
인기 연예인의 아들딸이 단지 핏줄이란 이유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데도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고 당연시한다. '누구의 자식인가'가 기회를 보장하고 출세의 프리패스가 된 세상이 조선의 신분사회와 무엇이 다른가.
배우에게 물어야 할 것은 조상의 능력이 아니라, 어떤 작품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줬느냐여야 한다. 스타의 출신 배경은 평가를 돕는 양념일 뿐, 본업을 대신하는 주재료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출신 성분'이 버젓이 배우 이름 앞에 달리며 현대판 족보를 만들어내고 있다.
'4대째 의사'에 감탄하던 대중이 '친일파 증조부'에 분노해 돌을 던지고 있다. 황색 저널리즘은 하영의 후광을 비추더니 이제는 그 과오를 캐내는 '파묘'에 전력을 쏟고 있다. 이제라도 차분하게 본질을 짚어내야 한다.
하영의 처지를 보면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과 함께 조상의 힘을 새삼 실감케 한다. 자본의 힘이 강해질수록 신분의 굴레가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하고 있어 씁쓸하다.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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