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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서울역사박물관은 중구 신당동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 '신당동: 神·新·Hip(신·신·힙)'을 발간했다고 7일 밝혔다.
서울책방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판매하는 이 보고서는 무속 신앙(神), 근현대의 주거·상업적 역동성(新), 트렌디함(Hip)을 주제로 신당동을 설명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신당동(新堂洞)은 과거 명칭이 신당동(神堂洞)이었다가 갑오개혁 이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신을 모시는 집을 뜻하는 '신당'(神堂)이 이름에 담겨 있었다.
조선시대 광희문은 시신이 도성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로 일명 시구문으로도 불렸고, 이 시구문 바깥 병자를 구휼하던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던 곳이 지금의 신당동이다.
당시 도성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됐던 무당들은 동활인서에 소속돼 마을을 이뤘고, 이 지역은 산 자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의 넋을 달래는 공간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일제는 신당동 일대에 교외 주택지 '문화촌'(文化村)을 조성하고 근대적 주거지로 재편했다. 이 시기 신당동은 일본인과 조선인 신흥 중산층을 위한 세련된 주거지로 자리 잡았다.
광복과 6·25 전쟁으로 해외 귀환 동포와 피란민들이 신당동 구릉지에 몰려들면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난개발의 위기에 놓였다.
이 시기 신당동은 '신당 토지구획정리사업'을 거쳐 현대적인 가로망과 주거 기반을 다졌고, 이때 다져진 뼈대가 지금도 신당동의 골격으로 남았다.
광복 이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떡볶이 거리, 쌀가게 골목 싸전거리, 개미처럼 열심히 살아갔다는 뜻의 개미골목, 철공업의 중심지였던 철공소거리 등을 형성했다.
보고서는 "최근 신당동은 서양권 관광객의 방문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하며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신당동의 압도적인 접근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신당동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극적인 변화상을 단 하나의 동네에 압축해 놓은 거대한 박물관"이라며 "보고서 발간이 무심코 걷던 신당동 골목길 이면에 켜켜이 쌓인 깊은 역사적 가치를 온전히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jae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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