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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군인 유족 "기억이 적대 아닌 또 다른 희생 막는 길 되길"
생사의 갈림길서 무장공비 생포한 최우영…30년째 이어진 인연

[연합뉴스 자료사진]
(강릉=연합뉴스) 강태현 기자 = "같은 핏줄인데 언제까지 한 민족이 적으로만 살아야 합니까. 다시는 우리 아들처럼 젊은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아야지요."
강효남(84) 씨의 시간은 30년 전 가을날에 멈춰 있다.
아들 고(故) 강정영 상병은 1996년 9월 22일 강릉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를 수색하던 중 총탄에 맞아 숨졌다. 꽃다운 스물한 살이었다.
"잠이나 들어야 잊어버리지, 안 잊혀요. 군복 입은 젊은이만 보면 아들 생각이 나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요."
강씨는 아들의 기일이 돌아오면 집에서 조용히 추도식을 치르며 살아 있었다면 어느덧 쉰을 넘겼을 아들의 삶을 그려보곤 한다.
그는 "살아 있었다면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돼 제 몫을 다했을 것"이라며 "'내 아들, 훌륭한 사람이 됐구나. 사랑스럽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눈물을 훔쳤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스물한 살 아들을 가족에게서 앗아간 비극은 나흘 전인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원 강릉 앞바다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작됐다.
강동면 안인진리 바다에는 어둠으로 인해 식별할 수 없는 물체와 파도가 맞부딪치며 '철컹' 소리가 울려 퍼졌다.
때마침 인근 도로를 지나던 택시 기사는 수상한 남성들과 바닷속에 떠 있던 검은 형체를 발견하고는 곧장 경찰서로 달려가 상황을 알렸다.
여명이 밝자 그 형체는 모습을 드러냈다. 암초에 걸린 북한 잠수함이었다.
잠수함에는 수류탄과 기관총, RPG-7 대전차 로켓포 등이 발견됐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때는 이미 정찰조와 안내조, 승조원 등 북한군 26명이 육지로 빠져나간 뒤였다.
무장공비 침투 사실이 알려지자 강원 대부분 지역에 '윙' 하는 경고음과 함께 최고 수준의 국지도발 대비 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하늘에는 헬기가 떠올랐고, 바다에는 군함이 들어섰으며 도로에는 군용차량과 무장 병력이 줄지어 이동했다.
밤이면 조명탄 불빛이 산과 마을을 대낮처럼 밝혔고 이따금 들려오는 총성이 어둠을 갈랐다.
당시 스물일곱 살 청년 경찰관이었던 최우영 중앙경찰학교 교무과장에게도 30년 전 강릉은 지금도 빛과 소리로 생생히 남아 있다.
택시 기사의 최초 신고 후 15시간이 지난 시점. 최 과장이 근무하던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에 "길옆 풀숲에 수상한 사람이 있으니 빨리 와달라"는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 장소는 잠수함이 발견된 곳에서 2㎞ 떨어진 강동면 모전리 한 농가였다.
동료 전호구 경장과 농가에 도착한 최 과장의 시야에 덥수룩한 머리와 남루한 티셔츠 차림의 남성이 들어왔다. 최 과장은 그가 무장공비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원 확인에 나섰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움직이면 쏜다"
실탄을 장전한 총을 겨누며 남성에게 다가가던 순간, 남성의 오른손이 티셔츠 아래 허리춤에 꽂아 두고 있던 권총으로 향했다.
그 순간 최 과장이 달려들어 손을 내리치자 실탄 13발이 든 권총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삶과 죽음이 엇갈린 순간이었다.
"어디서 왔느냐"
전 경장이 소총을 남성 배에 들이대며 강하게 몰아붙이자 잠시 머뭇거리던 남성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그제야 입을 열었다.
"북에서 왔수다"
최 과장은 머리끝이 쭈뼛하고 등골이 오싹했지만, 남성의 두 손을 묶어 그를 결박했다.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이광수(당시 31세)는 그렇게 붙잡혔다.
최 과장은 "이광수 씨가 경고를 무시하고 바로 권총을 뽑아 사격했다면 경찰관이나 신고자가 희생됐을 수 있고, 우리도 사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찰나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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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이듬해 방송 촬영을 위해 생포 현장에서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총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지만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아 살아남은 두 사람은 서로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게 됐다.
지금도 이따금 안부를 주고받는다. 최 과장은 군무원 생활을 마치고 제3의 인생을 사는 이광수를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따뜻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극적인 생포와 각별한 인연 뒤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불안도 따라붙었다.
최 과장은 북한 측으로부터 보복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출퇴근길마다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이듬해 북한 고위층 출신 귀순자 이한영 씨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한 아파트 복도에서 피살된 뒤에는 불안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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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광수의 생포로 침투 인원과 경로가 속속 드러났지만, 산속으로 흩어진 무장공비들의 저항은 이어졌다.
강 상병도 칠성산 수색·매복 작전에 투입돼 낮에는 산을 뒤지고 밤에는 차가운 참호 속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를 공비를 기다렸다.
"이 글이 나의 생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부모 형제가 그립고 친구가 그립다…(중략) 주여, 나를 지켜주소서. 적과 지금 직접 대면한다. 모두 상기된 얼굴 생환을 빈다" (강 상병이 생전에 남긴 일기)
그러나 이는 그가 남긴 일생의 마지막 기록이 됐다.
산에 숨어 있던 공비가 강 상병의 머리에 총을 쐈고, 함께 매복 중이던 권오택 상병이 수류탄을 던져 공비를 사살했다.
이후 강 상병을 업고 헬기가 있는 산 정상으로 내달렸지만, 강 상병은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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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공비 추적은 강릉에서 평창을 거쳐 인제까지 이어졌다.
49일간 계속된 작전은 11월 5일 인제 연화동에서 마지막 공비 2명을 사살하면서 끝났다.
침투한 북한군 26명 가운데 25명이 숨지고 이광수 1명이 생포됐다. 우리 측도 군인과 경찰, 예비군, 민간인 등 17명이 숨지고 장병 27명이 다쳤다.
30년이 흘렀지만 남겨진 이들에게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강씨는 "아들의 죽음이 잊히지 않길 바란다"며 "다만 그 기억이 적대와 증오에만 머물지 않고 또 다른 희생을 막는 길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최 과장 역시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나라를 지키려 한 수많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세워진 것으로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며 "우리가 즐겨 찾는 강릉 바닷가에 북한 잠수함이 침투해 많은 이들이 희생된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른 번의 가을을 보낸 지금도 누군가는 살아남은 찰나를 되새기고, 누군가는 잠이 들어야만 잠시 아들을 잊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taet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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