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금기 깨고 시간도 멈추게 한 '자주'

입력 2026-04-23 14:00:12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여름은 가혹하다. 고온 다습한 찜통더위는 사람의 진을 빼놓을 뿐만 아니라, 정성껏 빚은 술마저 위협한다. 냉장 시설이 전무했던 과거, 여름철 빚어놓은 술은 며칠만 지나도 시큼하게 변질되기 일쑤였다. 공기 중의 초산균이 알코올을 먹어 치우며 식초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술이 시어지는 현상은 양조가에게 가장 두려운 재앙이었고, 여름은 곧 '술이 죽어가는 계절'이었다.


이러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 조선의 양조가는 기발한 발상의 전환을 이뤄냈다. "술이 상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상하게 만드는 원인을 열로 다스리자."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술을 끓여서 만드는 '자주'(煮酒)다. 한자어 그대로 '끓인 술'을 의미하는 자주는 발효가 끝난 맑은 술(청주)에 열을 가해 보존성을 극대화한 가공주다. 술은 열을 가하면 알코올이 날아가 버리고 풍미가 손상된다는 양조의 절대 금기를 과감히 깨부순 결과물이었다.




자주 만드는 모습

[AI 활용 이미지, 제작 신종근]


자주를 만드는 방식은 단순한 가열이 아니다. 펄펄 끓는 물에 술을 직접 붓는 것이 아니라, 술이 담긴 항아리를 물이 끓는 솥 안에 넣고 간접적으로 열을 가하는 '중탕'(重湯) 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놀라운 과학적 통찰이다. 1860년대,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와인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60~70도의 낮은 온도에서 일정 시간 가열해 유해균을 죽이는 '저온 살균법'(Pasteurization)을 고안해 냈다. 이 발견은 현대 주류와 식품 산업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 조상은 파스퇴르보다 무려 600년이나 앞선 고려시대에 이미 같은 원리를 일상적인 양조에 적용하고 있었다.


중탕을 통해 술의 온도를 서서히 올리면, 알코올이 급격히 기화하는 끓는점(약 78도)에 도달하기 전에 술을 변질시키는 산패균과 효모의 활동이 먼저 정지된다. 선조들은 온도계 하나 없이 오랜 경험과 관찰만으로 알코올은 보존하면서 유해균만 선택적으로 사멸시키는 최적의 온도와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끓여낸 술은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맛이 변하지 않고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었다. 지혜가 빚어낸 조선판 생존의 술인 셈이다.


현대 주류 시장에서도 열을 가한 술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트 진열대에 상온 상태로 길게는 1년까지 놓여 있는 '살균 막걸리'나 '살균 약주'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의 자주와 현대의 살균 주류는 무엇이 다를까? 그 결정적 차이는 '맛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현대의 살균 주류는 고온순간살균(HTST) 등의 공법을 사용해 짧은 시간 열을 가한다. 이 과정의 유일한 목적은 술 안에 살아있는 효모와 젖산균 등의 미생물을 사멸시켜 '발효의 시계를 멈추는 것'이다. 열을 가하면 필연적으로 술 고유의 신선한 향이 날아가고 텁텁한 가열취(화덕 냄새)가 남기 때문에, 현대의 양조 공학은 어떻게든 가열 시간을 최소화하여 '원래 술이 가진 본연의 맛을 최대한 잃지 않게 방어하는 것'에 집중한다. 즉, 현대의 살균은 뺄셈을 최소화하려는 타협의 산물이다.


반면, 조선시대의 자주는 열을 살균의 도구로만 쓰지 않았다. 자주는 끓이기 전 술에 꿀과 후추를 투입한다. 여기서 열은 미생물을 죽이는 역할과 동시에, 후추의 단단한 조직 속에서 알싸한 에센셜 오일(매운맛과 향)을 뽑아내고 진한 꿀을 술과 완벽하게 유화시키는 '추출과 융합의 촉매'로 작용한다. 자주는 열이라는 시련을 통해 원래의 청주를 전혀 다른 성격의 고급 혼성주(Liqueur)로 재탄생시키는 연금술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꿀은 귀한 감미료였고, 후추는 황금과도 맞바꿀 만큼 값비싼 수입 향신료였다. 후추는 먼 아라비아와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다. 당시 후추 한 줌은 노비 몇 명의 몸값과 맞먹을 정도의 초고가 사치품이었다. 이러한 후추를 술에 넣었다는 것은 자주가 왕실이나 최고위층 사대부 가문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최고급 주류였음을 의미한다.


후추의 강렬하고 매콤한 스파이시함은 꿀의 묵직한 단맛과 어우러지며 술에 입체적인 풍미를 부여했다. 또한 후추 자체가 가진 강력한 항균 작용은 중탕 살균법과 시너지를 일으켜 술의 보존성을 이중으로 끌어올렸다. 달콤하면서도 알싸하고, 따뜻하면서도 깊은 향을 내는 이 술은 오늘날 서양의 스파이시 럼(Spiced Rum)이나 허벌 리큐르(Herbal Liqueur)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완벽한 형태의 'K-리큐르'다.




동국이상국집(좌측)과 고사촬요

[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 캡처]


자주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가 남긴 '동국이상국집'에 백주, 녹파주, 이화주 등과 함께 이름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54년 어숙권의 '고사촬요'에도 자주 빚는 법이 명시되어 있고 '동의보감'에도 살균의 적정 온도를 찾는 방법이 나와 있다. 이후 1600년대 후반 안동 장씨 부인이 쓴 '음식디미방'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잊혔던 자주는 최근 현대의 양조가에 의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국순당은 우리 술 복원 프로젝트인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통해 옛 문헌 속 자주의 레시피를 재현해 냈다.




국순당의 자주 700㎖와 550㎖

[홈페이지 캡처]


잔에 따르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쌉싸름한 후추의 향, 그리고 혀끝을 감도는 꿀의 달콤함과 약주의 산미가 넘쳤다. 차갑게 해서 마시면 후추의 알싸함이 청량감을 더해주고, 겨울철 뱅쇼나 따뜻한 사케처럼 데워 마시면 꿀의 진한 향이 몸을 덥혀준다. 계절과 음용 온도에 따라 천의 얼굴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술이다.


자주(煮酒)는 그저 하나의 옛날 술로 봐선 안된다. 부패라는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을 도입하고, 가장 값비싼 재료를 과감하게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낸 선조들의 혁신 정신 그 자체다.


'술은 끓이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그들의 과감한 시도는, 오늘날 세계 주류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우리 K-리큐르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 어쩌면 그 해답은 600년 전 여름날 가마솥에서 끓어오르던 맑은 술 한 병 속에 이미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인기상품 확인하고 계속 읽어보세요!

5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연합뉴스 콘텐츠 더보기

해당 콘텐츠 제공사로 이동합니다.

많이 본 최근 기사

관심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