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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대한민국의 대기업은 과연 서울을 떠나 지역에 본사를 옮길 용기가 있는가? 이 도발적인 질문은 그저 기업 주소지의 이전을 넘어, 기업이 한 도시의 생태계를 책임지는 '창조적 주체'가 될 수 있느냐는 본질적인 물음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행정수도 건설과 공공기관 강제 이전을 통해 지역 균형 발전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이 정책은 구조적으로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정부가 주도한 이전은 '공간의 이동'에는 성공했지만, '생태계의 이전'에는 실패했다. 혁신도시는 건물과 조직은 갖췄지만, 삶과 문화, 그리고 미래에 대한 서사는 결여된 채 남아 있다. 금요일 오후면 불 꺼진 도시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은 이동했지만, 정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부 주도형 이전 정책의 근본적 문제는 기업과 개인을 '정책 대상'으로만 바라본 데 있다. 지역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배치의 결과'가 되었고, 그 결과 인재는 여전히 수도권을 지향한다. 기회가 서울에 집중된 상황에서, 지역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다. 인재가 없으니 기업은 가지 않고, 기업이 없으니 인재는 떠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국 아칸소주의 작은 도시, 벤튼빌(Bentonville)의 사례를 주목해야 한다. 이 도시는 정부가 만든 계획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샘 월튼(Sam Walton)이라는 한 기업가의 선택에서 출발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 아닌 이곳을 '사업의 뿌리'로 삼았고, 성공 이후에도 대도시로 떠나지 않았다. 고향이 아닌 곳을 고향으로 만든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 결과 그가 창업한 '월마트'(Walmart)는 하나의 로컬 기업 차원이 아니라 도시를 설계하는 주체가 되었고, 벤튼빌은 본사 소재지를 넘어 하나의 산업·문화 생태계로 성장했다. 이는 정부가 아닌 민간이 주도해 지역의 서사를 구축한 대표적 사례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기술적 차원으로 살펴보면 벤튼빌은 혁신의 '테스트베드'이자 '라이브 랩'(Live Lab)이 됐다.
벤튼빌은 기업이 지역을 어떻게 혁신의 장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드론 배송과 자율물류 시스템은 아직 완전히 일상화된 단계는 아니지만, 실제 서비스로 빠르게 확장되는 현장형 실험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는 기술이 하나의 효율성 도구뿐 아니라, 지역 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수단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업이 기술을 통해 지역의 생활 인프라를 혁신하면, 그 지역은 더 이상 '불편한 지방'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삶의 공간'이 된다. 인재가 이동하는 기준은 더 이상 임금만이 아니라, 삶의 질과 경험이 된다.
커뮤니케이션 차원으로 보면 도시를 '메시지'로 만드는 전략이 주효했다.
벤튼빌의 진짜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서사다. 월튼 가문이 설립한 크리스탈 브릿지 뮤지엄(Crystal Bridges Museum of American Art)은 문화 인프라를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재정의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으로 작동하며, 기업의 철학이 공간과 경험을 통해 전달된다.

[홈페이지 캡처]
이러한 '로컬 서사'는 브랜딩 이상의 효과를 만들었다. 즉, 인재를 끌어들이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기업이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고, 그 정체성이 다시 기업의 경쟁력이 되는 순환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델이 하나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피츠버그(Pittsburgh)는 기업과 재단, 대학이 결합해 산업 쇠퇴를 극복한 '회복형 모델'을 보여주며, 이곳의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esearch Triangle Park)는 대학과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생태계를 설계한 '지식 클러스터형 모델'을 보여준다. 지역 발전은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경로로 구축될 수 있다.

[홈페이지 캡처]
이처럼 우리나라에도 기업과 지역이 함께 만드는 고유의 네러티브와 정체성이 절실하다.
한국의 지역균형 발전 정책이 직면한 한계는 명확하다. 정부는 공간을 만들 수는 있지만, 생태계와 서사를 만들 수는 없다. 도시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선택이며, 계획이 아니라 이야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정책의 방향 전환이다. 기업이 지역 이전을 '의무'가 아니라 '전략'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간이 지역의 정체성을 설계하고 서사를 구축하는 주체가 돼야 하며, 정부는 그 선택을 지원하는 역할로 전환해야 한다. 세제 혜택, 규제 완화, 인프라 지원은 이러한 민간의 결단을 뒷받침하는 수단이 돼야 한다.
지역은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이어야 한다. 기업이 한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 과정에서 도시와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질문은 다시 우리 기업에게로 던진다. 기업은 그저 지역으로 생산기지 일부를 '이전'할 것인가, 아니면 한 도시의 서사를 만들고 산업생태계를 번영할 것인가. 한국형 벤튼빌은 정부가 만들 수 없다. 스토리가 있는 기업만이 서사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유경한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한국방송학회 이사 ▲ 네이버ㆍ카카오 뉴스제휴평가위원회 위원 ▲ 한국언론정보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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