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정부 "피 안 모자란다"는데…요양병원 왜 '수혈 사각지대' 됐나

입력 2026-10-19 06:00:11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자체 보관시설 없는 중소·요양병원, 소량 수요·거점 경유 구조에 '병목'


"기관 등급 아닌 환자 혈색소 수치 등 '임상 중증도' 기준 패스트트랙 필요"




ABO 혈액형 (PG)

[김민아 제작] 일러스트


(서울=연합뉴스) 서한기 기자 = 혈색소(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인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4.0g/dL대 고령 환자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유로 2주 가까이 수혈을 받지 못하는 현실은 국내 혈액 공급망의 구조적 허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보건당국은 "전체 혈액 보유량은 부족하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어 거시적인 혈액 수급 통계와 일선 의료현장이 겪는 '말단 공급 지연' 사이에 적지 않은 괴리가 존재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의료계에 따르며 현재 국내 의료기관의 혈액 수급 여건은 자체 혈액 보관 시설(혈액은행·수혈관리실) 보유 여부와 기관 규모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대학병원 등 대형 의료기관은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이나 한마음혈액원 등 공급혈액원으로부터 직접 혈액을 정기적으로 공급받아 원내에 비축해 두고 사용한다.


반면 자체 보관 시설과 전담 인력을 갖추기 어려운 대다수 중소병원과 요양병원은 혈액을 미리 쌓아두지 못한다. 평소 수술 등 대량 수혈 수요가 없다 보니 환자에게 수혈이 필요할 때마다 그제야 혈액원에 요청해 직접 타 오거나, 지역 내 거점 역할을 하는 특정 병원(혈액공급소)에 신청해 혈액을 나눠 받는 구조다. 인천 서해구(구 서구)를 비롯한 상당수 지역에서는 관내 수많은 중소·요양병원이 단 한 곳의 거점 병원에 의존해 혈액을 배분받고 있다.


문제는 이 '소량·비정기적 말단 공급망'에서 심각한 병목 현상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 혈액장기정책과 관계자는 "혈액이 모자란 상황은 아니어서 본부 등에 요청하면 공급을 해줄 텐데, 중소·요양병원은 수요가 많지 않아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쓰다 보니 수급 과정에서 시차가 생길 수 있다"며 "거점 병원에서 왜 그런 지연이 발생하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말했다.


당국의 인식처럼 중앙 차원의 혈액 재고가 바닥나지 않았더라도, 일선 거점 병원이나 배송망에서는 자체 수요와 응급 수술 기관을 우선시하느라 요양병원의 소량 요청을 후순위로 미루는 '전달 체계의 동맥경화'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의료계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공급 구조가 '환자의 실제 위급도'를 외면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대학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비응급 만성 질환자이더라도 혈색소 수치가 8.0g/dL 수준이면 원내 비축 혈액으로 어렵지 않게 수혈받는다. 그러나 요양병원 환자는 당장 산소 공급이 안 돼 숨쉬기조차 힘든 혈색소 4.0∼5.0g/dL 상태여도 1∼2주씩 피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환자의 생물학적 위급함이 아니라 '입원해 있는 병원의 간판과 보관시설 유무'가 수혈 시기를 결정하는 역설이다.


더구나 최근 요양병원의 환자 구성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보건당국은 여전히 요양병원을 '수술하지 않는 단순 요양 기관'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지만, 실제 현장에는 폐렴 등 급성기 합병증을 앓거나 노화로 인한 골수 기능 저하·미세 출혈로 주기적인 수혈이 필수적인 80∼90대 중증 고령 환자가 드물지 않다.


이들에게 침습적인 정밀검사를 강행하는 것은 의학적으로나 보건경제학적으로 실익이 없어, 적기 수혈이 사실상 유일한 생명 유지 수단이다. 수혈이 지체돼 상급병원으로 전원을 권유해도 경제적 이유 등으로 옮기지 못하는 환자가 대다수이고, 자칫 사고가 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요양병원이 떠안게 된다.


전문가들은 복지부와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등 관계 당국이 전체 보유량 통계에만 머물지 말고, 중소·요양병원의 말단 혈액 전달 실태를 전면 점검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무엇보다 의료기관의 종별 등급이나 보관시설 유무가 아니라 환자의 객관적인 임상 수치(중증도)를 기준으로 한 '긴급 수혈 패스트트랙' 도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요양병원 등 중소 의료기관이라 할지라도 혈색소 수치 5.0g/dL 이하 등 생명 유지에 직결되는 위험 수치가 확인된 환자에 대해서는 거점 병원의 대기 순번과 무관하게 관할 혈액원이 직접 혈액을 긴급 배송하거나 우선 배정하는 예외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선 요양병원의 한 전문의는 "정부가 말로는 필수의료를 강조하면서 정작 요양병원에서 피가 없어 숨이 넘어가는 중증 노인 환자들은 공급 시스템 밖으로 방치되고 있다"며 "복지부와 적십자사는 자체 혈액 보관시설이 없는 일선 병원에서 피 한 팩이 위급 환자에게 닿기까지 왜 2주씩 걸리는지 즉각 실태를 파악하고 배분 기준을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shg@yna.co.kr



인기상품 확인하고 계속 읽어보세요!

5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연합뉴스 콘텐츠 더보기

해당 콘텐츠 제공사로 이동합니다.

많이 본 최근 기사

관심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