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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제공]
오래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세계생리학회(IUPS) 학술대회에 참석한 일화다. 스승인 데니스 노블 옥스퍼드대 교수의 강연을 앞두고 필자는 소개용 만평 한 장을 그렸다.
커다란 코끼리 몸통에 'LIFE'라고 적었다. 그 위로 쥐들이 기어오른다. 코끝에 매달린 쥐는 화학을, 머리에 올라탄 쥐는 임상의학을, 등을 타고 가는 쥐들은 생리학과 유전학을 외친다. 배 밑과 뒷다리 쪽에서는 공학과 물리학, 분자생물학을 외친다. 모두 자기가 붙잡은 부분이 코끼리라고 우긴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쥐 한 마리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소리친다.
"시스템생물학!"
그림의 착상은 1천300여 년 전 신라에서 얻었다. 원효대사는 '열반종요'에 이렇게 적었다.
"저 눈먼 이들이 저마다 코끼리를 말할 때 그 실체를 얻지는 못했으나 코끼리를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불성을 설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여섯 가지 법이 곧 불성은 아니지만 여섯 가지 법을 떠나 있지도 않다."
코를 만진 사람도, 다리를 만진 사람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누구도 코끼리 전체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주장을 화해시키고 하나로 꿰어내는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을 필자는 학문의 태도로 읽는다. 어느 한 학문만 따르지 말되, 어느 학문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생명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적확한 가르침을 찾기 어렵다.
◇ 쪼개서 알게 된 것, 쪼개서 놓친 것
현대 의학은 몸을 잘게 나누면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생명의 기본 단위는 세포다. 비슷한 세포가 모여 조직이 되고, 조직이 모여 장기가 되며, 장기가 이어져 순환·호흡·소화·신경 같은 계통을 이룬다. 교과서는 이 순서대로 몸을 설명하고, 병원은 이 구분대로 진료과를 나눈다.
그러나 몸은 교과서의 목차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이 뛰는 동안 콩팥은 소금기를 조절하고, 뇌는 호르몬을 내보내며, 장은 음식을 분해한다. 모든 일이 동시에, 서로 얽혀서 일어난다. 우리 몸을 한 사회에 빗대면 이해가 쉽다. 통신과 교통, 에너지 공급, 쓰레기 처리, 생산을 맡은 부서가 따로 있어도 사회는 한 덩어리로 굴러간다.
이 전체를 붙잡아 주는 힘이 항상성이다. 체온과 혈당, 체액은 늘 일정한 범위 안에 머문다. 체온이 오르면 땀을 흘려 식히고, 떨어지면 몸을 떨어 열을 낸다. 동양에서는 이를 음양의 조화라 불렀다. 생리학 교육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이 있다. "항상성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것이 의학의 목표다." 노벨상의 해당 분야 이름이 '생리의학상'인 것도 그런 연유다.
사람을 조직이나 장기 같은 부분으로 보지 않고 전체의 조화를 살피는 관점을 전기성(全機性)이라 한다. 서양의 항상성과 짝을 이루는 동양식 표현이다. 필자는 의학이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부분을 들여다보는 데 익숙해지면 한 가지 버릇이 생긴다. 현미경에 잡히지 않는 것, 수치로 재지 못하는 것을 없는 것으로 여기는 버릇이다.
폭포수 아래 30분에서 1시간쯤 머물면 목의 뻣뻣함이 풀린다. 숲에 들어서면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누구나 겪어본 일인데 과학은 아직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전기와 자기가 몸에 미치는 영향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에너지를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며 기기로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동양의 기(氣)나 고대 그리스인이 말한 프네우마처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느껴온 에너지가 모두 계기판에 잡히지는 않는다.
18세기 이탈리아의 루이지 갈바니를 떠올려본다. 그는 개구리 다리 근육이 금속에 닿아 움찔하는 것을 보고 생물의 몸에 전기가 흐른다고 주장했다. 전지를 발명한 알레산드로 볼타는 이를 반박했고, 세상은 갈바니를 비웃었다. 갈바니는 이렇게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정반대인 두 무리에게 공격받고 있다. 과학자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둘 다 나를 '개구리 춤 선생'이라 부르며 비웃는다. 그러나 나는 자연의 위대한 힘 가운데 하나를 발견했다는 것을 안다."
오늘날 우리는 신경과 근육, 심장이 전기신호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안다. 시인 셸리는 "인간은 전기를 띤 진흙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모른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태도는 과학적이지 않다.
◇ 우리는 각자 유전공학자다
유전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있다. 한때 유전자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설계도처럼 여겨졌다. 라마르크가 살면서 얻은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진다고 주장했을 때 학계는 오랫동안 그를 틀린 사람 취급했다.
후성유전학은 이 오래된 논쟁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먹고, 얼마나 움직이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유전자가 켜지고 꺼진다. 타고난 유전자를 바꾸지는 못해도 어떤 유전자를 쓸지는 어느 정도 우리 손에 달린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각자 자기 몸의 유전공학자다.
인간을 생명의 중심에 두는 생각도 한 번쯤 뒤집어볼 만하다. 우리 세포 속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미토콘드리아, 식물이 햇빛을 받아들이는 엽록체는 먼 옛날 다른 세포 안에 들어가 눌러앉은 박테리아에서 비롯됐다. 박테리아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무엇일까. 먹을 것이 넘쳐나는 근사한 뷔페식당쯤 되지 않을까.
몸을 쪼개 보는 습관은 생각하는 방식에도 스며 있다. 우리는 이분법과 사지선다형 정답에 너무 익숙하다. 몸과 마음을 나누고, 선과 악을 나누고, 건강과 질병을 나눈다. 세상 모든 문제에 옳은 답이 하나씩 정해져 있는 것처럼 군다.
대학도 다르지 않다. 학부와 학과는 지나치게 잘게 쪼개졌고, 고등학생 때부터 문과와 이과를 가른다. 옥스퍼드대에는 철학과 정치학, 경제학을 함께 배우는 PPE 과정이 있고, 한때는 심리학과 철학, 생리학을 묶은 과정도 있었다. 전공과 종교, 국적이 다른 학생들이 한 칼리지에 모여 먹고 자며 논쟁한다. 비용이 많이 드는 제도지만 그만한 값을 한다.
좁은 분야를 깊이 파는 전문가는 앞으로도 필요하다. 그와 함께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조각을 이어 붙일 줄 아는 사람이 더 절실해졌다. 코끼리 옆에서 "시스템생물학!"을 외치던 그 쥐 같은 사람 말이다.
◇ 몸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지구로
몸 안의 시스템이 협동해 한 사람을 이루듯, 사람들은 모여 소통하고 협력하며 사회를 이룬다. 사회는 다시 박테리아와 식물, 동물과 어울려 지구의 생태계를 이룬다. 한 단계의 조화가 깨지면 다음 단계도 흔들린다.
일상에서 이 조화는 배려와 자기주장 사이의 균형으로 나타난다. 길에서 어깨를 툭 치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 지하철에서 내리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밀고 들어가는 사람, 떼를 지어 길을 막고 걷는 사람을 볼 때마다 필자는 우리 몸의 세포들을 생각한다. 세포 하나가 제 몫만 챙기기 시작하면 그것을 우리는 암이라고 부른다.
모든 생명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내 몸을 제대로 아는 일은 결국 타인과 사회, 자연 속에서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아는 일이다. 필자는 이를 생태적 마음이라 부르고 싶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엄융의 서울의대 명예교수
▲ 서울의대 생리학교실 교수 역임. ▲ 영국 옥스퍼드의대 연구원·영국생리학회 회원. ▲ 세계생리학회 심혈관 분과 위원장. ▲ 유럽 생리학회지 '플뤼거스 아히프' 부편집장(현). ▲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회원(현). ▲ 대구경북과학기술원 학제학과 의생명과학전공 초빙석좌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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