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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관비 유학생 출신이나 귀국 요청·국내 행보서 극명한 차이
온라인서 일제 협력 흔적 없는 김익남 생애 주목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제공]
(서울=연합뉴스) 서효주 인턴기자 = '현재 논란인 안상호와 정반대 길을 걸었던 조선인 의사.'
지난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려진 게시물 제목이다. 이 글은 최근 이슈가 된 배우 하영(33·본명 안하영)의 증조부 안상호(1872~1927)처럼 관비 유학생 출신 의사였던 김익남(1870~1937)의 생애를 비교·소개해 화제가 됐다.
최근 안상호의 친일 논란이 재점화되면서 그와 마찬가지로 구한말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전공했으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김익남의 행보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 안상호, 친일 단체 활동·언론 보도 논란…증손녀 하영 "진심으로 사죄"
14일 대한제국 시기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 연구위원의 '최초의 근대 개업의 안상호의 생애와 활동' 논문 등에 따르면 안상호는 1898년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지케이의원의학교(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 전신)에서 공부한 뒤 일본 의사면허를 취득해 현지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
이후 1907년 귀국해 한국인 최초로 서양식 병원을 개원했으며, 고종의 왕실 진료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안상호는 1916년 결성된 친일 단체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등 친일 행적 의혹을 받고 있다. 대정친목회는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이 고문을 맡았으며, 조선총독부의 내선융화 정책에 적극 동조했던 단체로 평가받는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제공]
일제강점기 언론 보도 역시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1918년 12월 10일 자 매일신보에는 안상호가 일본인 아내와 결혼한 뒤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매운 음식도 못 먹는다"라고 언급한 내용이 '일선동체'의 모범 사례로 소개됐다.
이에 증손녀인 배우 하영은 지난 12일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관련 자료를 직접 찾아보는 과정에서 증조부의 친일적 행적을 알게 됐다"며 "과오를 무겁게 받아들이며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다만 학계 일각에서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안상호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으며, 역사적 단죄 대상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학술적 검토와 연구가 아직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 같은 관비 유학생…졸업 후 갈린 두 사람의 길
이처럼 안상호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면서 삶의 궤적이 뚜렷이 달랐던 김익남이 재조명받고 있다. 같은 관비 유학생 출신이지만 졸업 이후 조국을 대하는 두 사람의 행보가 극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김익남은 안상호보다 3년 앞서 지케이의원의학교를 졸업한 선배다. 두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국립) 근대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의 교관(교수) 임명 요청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갈라섰다.
김익남은 1899년 7월 지케이의원의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의학교 교관으로 취임하라는 요청을 받자 1900년 8월 귀국해 교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4년 동안 의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며 총 32명의 한국인 근대 의사를 배출했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던 시기에 근대 의학 교육을 받은 최초의 의사 집단을 양성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의학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황상익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제공]
김익남은 4년 후 국가의 요구로 대한제국 육군 군의장으로 전임한 뒤에도 의료계와 군진의학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08년에는 일본인 의사단체인 '계림의학회'에 대항해 우리나라 최초 의사단체인 '의사연구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김익남 후임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안상호였다.
하지만 안상호는 1904년 10월 교관으로 임명됐음에도 귀국을 거부했다가 석 달 뒤 해임됐다. 안상호는 1907년 의학교가 일제 통감부에 의해 대한의원에 강제 통합된 이후에야 귀국했다.
◇ 전문가 "일제 포섭 시도 가능성 크지만 협력 흔적 없어"
김익남이 일제와 거리를 두다 불이익을 받은 정황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그는 1907년 6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자결한 정재홍 의사의 추모 사업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불이익을 받았고, 일제가 한국 의료계를 통제하기 위해 발급했던 공식 의사 면허증인 '의술개업인허장'을 끝내 받지 못했다.

[황상익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제공]
황상익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는 이를 김익남이 일제에 포섭되거나 협력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로 평가했다.
황 교수는 "의료계와 교육계, 군진의학 분야에서 요직을 거친 김익남은 일제가 적극적으로 포섭하려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이라며 "그런데도 일제에 협력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처럼 뛰어난 업적에도 김익남의 생애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까닭은 그가 기반을 두었던 의학교 역사와 관련이 깊다.
황 교수는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설립한 의학교는 국권 상실과 함께 8년 만에 폐지된 이후 그 역사와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김익남 역시 국가가 사라지면서 자신이 활동했던 제도적 기반을 잃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익남의 생애는 2000년대 들어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자료 발굴을 통해 비로소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2015년 서울 종로구에 의학교 터 표석이 들어섰고 2018년에는 서울대 의과대학 연건캠퍼스 내 김익남 동상이 세워졌다.
황 교수는 "최근 논란이 역설적으로 한국 근대의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이번 계기를 통해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김익남 선생과 의학교의 역사적 가치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촬영 안 철 수] 2026.3,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의과대학
seohyoj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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