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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100주기 가네코 후미코…'일왕 암살 계획' 세우고 법정서 "조선독립 만세"
일본의 '쉰들러' 후세 다쓰지…'조선인 학살' 조사하고 조선인 독립운동가 변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김철선 기자 = 지금으로부터 81년 전, 엄혹했던 일제 식민통치를 벗어나 한반도가 빚을 되찾기까지 그 지난한 과정에는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다.
그때 대한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억되진 않았지만, 남아 있는 사료와 기록으로 공적이 확인된 이들에게 후대는 '독립유공자'라는 호칭과 훈장·포장을 수여했다.
독립의 길에 떨어진 피와 땀의 주인은 대부분이 국권을 빼앗긴 조선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조선인이 전부는 아니었다. 대한독립을 외친 외국인 독립유공자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들은 대한독립을 위해 조국과 맞서 싸운 일본인 독립운동가. 정의와 인권의 편에 섰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두 사람이다.
14일 보훈부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포상을 실시한 1949년부터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정부 포상을 받은 사람은 총 1만9천59명이다.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총 80명이다. 중국이 34명으로 가장 많고 미국(23명), 영국·캐나다(각 6명), 프랑스·호주(각 3명) 등이다.
이 가운데엔 독립운동 업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일본인도 2명도 포함돼 있다.
올해 서거 100주기를 맞은 가네코 후미코. 그는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제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연인이자 무정부주의 운동 동지였던 독립운동가 박열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저항했다.
일제 요주의 인물이던 그는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 때 박열과 함께 체포됐고, 천황을 폭사시키려 했다는 '대역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재판 내내 조선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정한 그는 자신을 조선 이름인 '박문자'로 밝혔다. 법정에서 박열과 함께 사형을 선고해 달라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고, 사형 판결 즉시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체포된 이후 옥중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일제의 재판을 비웃는 듯한 포즈의 결혼사진이 공개돼 주목받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1926년 7월 23세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그의 유해는 남편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혔다.
사망한 지 92년이 지난 2018년 한국 정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공식 인정하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올해 서거 100주기를 맞아 추모식과 사진전, 학술대회 등 그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국내에서 열리기도 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또 한명의 일본인 독립유공자는 '일본의 쉰들러'로 불린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
1879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한 그는 1919년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을 비롯해 여러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다. '국가 전복 모의' 혐의를 받은 박열·가네코 부부를 대신해 법정에서 싸웠고, 옥중에서 숨진 가네코 선생의 유해를 거둬 한국으로 운구한 것도 그였다.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가리지 않고 정의의 편에 서서 보편적 인류애를 실천했던 그는 1932년 법정 모독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1933년에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일제 패망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한 선생은 새로운 평화헌법 보급과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투쟁에 매진하다 1953년 서거했다.
정부는 그의 독립유공 공적을 인정하고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건국훈장을 받은 최초의 일본인이다.
비록 서훈은 받지 못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을 위해 헌신한 일본인들도 여럿 있다.
조선의 문화와 자연을 지킨 의인으로 평가받는 아사카와 노리타가(淺川伯敎)·다쿠미(淺川巧) 형제가 대표적이다.
1913년 경성의 남산심상소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한 노리타카는 조선 도자기에 심취해 전국을 답사하며 도자기의 역사를 정리했다. 수집한 도자기와 공예품 3천500여 점을 당시 경복궁 내 설립된 조선민족박물관에 기증했다.
동생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오엽성(잣나무) 노천매장법'을 개발하는 등 황무지였던 한반도의 녹화 사업에 헌신했다.
1931년 4월 2일 식목일을 앞두고 40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는 사망 전에 "조선의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경기도 양주군 이문리에 묻혔다가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으로 옮겨졌다.
이외에도 일본인 교사로서 식민지 조선에서 교육운동을 펼친 조코 요네타로(上甲米太郞), 경성제대 교수로서 반제국주의 운동을 한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조선인 동료들과 노동운동을 벌인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 등도 조선인들과 함께 일제에 맞섰다.
국가보훈부는 역사 기록과 사료 조사를 바탕으로 미서훈 독립유공자를 지속해서 발굴 중이다. 현재 독립유공 조사 대상에는 일본 국적의 인물들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부 관계자는 "독립기념관 내 '독립유공자 발굴TF'와 협업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 독립유공자 발굴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며, 발굴에 따라 외국인 독립유공자가 꾸준히 늘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kc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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