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르포] 북한산 자락 달동네 정릉골의 철거 전 마지막 여름…"기억해주길"

입력 2026-07-19 10:00:01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철거 후 고급 타운하우스 들어설 예정…"돈 없어도 불안하지 않던 동네"


한 달간 '굿바이 정릉골' 행사로 추억 곱씹어…다큐멘터리 영화 상영도




정릉골 주민 정덕영씨의 집

[촬영 양수연]


(서울=연합뉴스) 양수연 기자 = '정릉골'이 마지막 여름을 보내고 있다.


서울 성북구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달동네. 산책을 나온 시민들로 북적이는 바로 아래 정릉천과 달리 비탈길을 따라 올라선 마을은 고요했다.


한때 1천2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곳이었다. 2024년 1월 주택재개발 관리처분계획 인가로 이주가 시작되면서 19일 이날 기준 마을에 남은 건 10여가구뿐이다.


강제 집행에 맞서 끝까지 버티던 네 가구도 지난달 30일 이주에 합의했다.


곧 철거가 이뤄지면 정릉골 달동네 자리에는 1천411세대 규모의 고급 타운 하우스가 들어설 예정이다.




정릉골 골목에 쌓인 쓰레기더미

[촬영 양수연]


동네 길목에는 버려진 가전과 집기, 뒹구는 생활 쓰레기가 가득 쌓여있었다.


벽에는 눈비에 해진 조합과 주민들의 낡은 벽보가 너덜거렸고, 재개발 매물을 홍보하는 부동산 전단 위로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얽혀 있었다.


'새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한다', '재개발 투기의 불을 꺼라' 등 분필로 벽에 눌러쓴 문구에서는 그간 철거민 투쟁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었다.




정릉골 여기저기 남아있는 주민과 활동가들의 흔적

[촬영 양수연]


발걸음을 조금 옮기니 다정하고 따뜻한 삶의 흔적도 남아있다. 벽에 쓴 시와 그림, 화분들로 살뜰하게 꾸며진 판잣집엔 정덕영(56)씨가 있었다.


2년 전 아내와 요양을 위해 정릉골로 이주한 정씨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아내가 이곳에서 예술 활동을 하며 활기를 되찾았다고 전했다.


주변 이웃들과 어울리면서 모처럼 마음 편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런 부부도 이번 달 중에 집을 비울 예정이다.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낀 정씨는 "왜 자꾸 이런 동네를 없애려고만 하는지 모르겠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정릉골로 향하는 길목에 걸린 재개발조합과 세입자대책위 현수막

[촬영 양수연]


주민 한민경(61)씨는 키우던 꽃들이 눈에 밟힌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마당에 있는 꽃을 세어 보니 서른가지나 됐다"며 "요즘은 백일홍이 피고 지고 너무 예쁜데, 꽃들을 어떻게 두고 가야 할지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정릉골의 마지막 여름이 그저 쓸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철거민 투쟁에 연대해온 활동가들은 이웃과 격의 없이 정을 나누던 정릉골의 풍경을 이어가고 있었다.


도시빈민 사회선교단체 '옥바라지선교센터'를 중심으로 정릉골 주거세입자대책위원회와 함께 투쟁한 연대인들은 7월 한 달을 '굿바이 정릉골' 기간으로 정했다.


저녁이 되자 비탈진 공터가 있는 정릉 '안골'에는 주민과 활동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주민들이 만든 카레 냄새가 공터에 퍼졌다. 이야기꽃과 함께 넉넉하게 준비한 100인분의 식사는 금세 동이 났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재개발을 앞둔 정릉골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나무가 흔들릴 때 마음이 찾아온다'를 함께 시청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주민과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영화를 보고 이야기 나누는 모습

[촬영 양수연]


주민들은 정릉골에서 보낸 시간 동안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했다.


주민 김영리(57)씨는 "별난 사람들끼리 서로 부침이 있어도 하루만 안 보이면 '아, 저 집 어디 갔어?' 안부를 서로 묻고 얘기하던 게 기억에 남는다"며 "돈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동네"라고 회고했다.


또 정릉골의 겨울을 떠올리며 "눈이 막 오는데도 줄을 쫙 서서 연탄 봉사를 해주고 그런 게 굉장히 고맙고 따뜻했다"며 "세상이 여유 없고 험하다고 해도 따뜻하게 마음을 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민만큼 동네를 아끼던 활동가들도 추억을 곱씹었다.


최하은 활동가는 "정릉골에는 네모난 칸에 효율성을 찾아 만든 방이 아니라, 각자 가꾸면서 더 아름다워진 손때 묻은 집들이 있다. 또 정다운 사람들, 뻐꾸기 소리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전 동네의 모습을 잃게 되더라도 이런 동네가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정릉골구역

[성북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seele@yna.co.kr



인기상품 확인하고 계속 읽어보세요!

5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연합뉴스 콘텐츠 더보기

해당 콘텐츠 제공사로 이동합니다.

많이 본 최근 기사

관심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