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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슬픈 우승자' 손기정 타고 베를린 간 그 열차

입력 2026-05-23 07: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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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역서 '파리행'·'모스크바행' 열차표 판매


'열차 해외여행' 잊혀…공급망 '대륙 연결' 새 구상 필요




도라산역 평양방면 개찰구

(연합뉴스DB)


(서울=연합뉴스) 한승호 선임기자 = 서울역에서 올라 탄 열차는 경의·중앙선 철로를 2시간가량 달려 남쪽 마지막 역이자 휴전선을 넘어 북쪽으로 가는 첫번째 역인 도라산역에 도착했다. 도라산역은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어 사전 허가받은 인원만 들어갈 수 있다.


도라산역에는 '평양방면 타는 곳' 개찰구가 설치돼 있다. 한산한 이 개찰구 전광판에는 '앞으로 한국철도가 시베리아철도(TSR), 중국철도(TCR)와 연계되는 날, 도라산역은 대륙을 향한 출발점으로 그 의미를 다시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흐르고 있다. 2003년 경의선 철도를 연결하면서 '굳은 다짐'처럼 새긴 것이다.


경의·중앙선은 2014년 수도권 전철 경의선과 수도권 전철 중앙선을 하나의 노선으로 직결 운행하면서 통합됐다. 서울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은 대한제국이 건설을 시작했으나 열강의 이권 쟁탈이 벌어지며 일본이 군사용으로 만들어 1906년 개통됐다.




유라시아 횡단철도 노선도

(연합뉴스DB)


북한의 국경도시인 신의주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단둥(丹東)과 마주보고 있다. 한반도가 분단되기 이전인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지금의 서울)이 유라시아 대륙철도의 출발지였다. 철도 역사를 들여다 보면, 당시 경성역 매표소에서는 '모스크바행', '파리행', '베를린행' 열차표를 판매했다.


실제로 부산을 출발해 경성을 거쳐 유럽까지 가던 이 대륙횡단 코스는 지식인, 예술가, 체육인들의 주요 이동 경로였다. 이 열차로 유럽을 다녀온 대표적인 인물은 고인이 된 '슬픈 우승자' 손기정 선수다.


손기정 선수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서 부산으로 건너와 이 열차를 타고 경성역을 출발해 평양과 신의주를 지나고 중국 단둥과 러시아 모스크바를 거쳐 독일 베를린까지 갔다. 보름가량 걸린 기나긴 여정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손기정 선수

(연합뉴스DB)


그는 열차가 역에 설 때 내려 몸을 풀거나 기차 복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컨디션을 조절했다고 한다. 결국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일장기를 달고 뛰었지만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로 기록됐다.


1930년대 한국에서 유럽을 가는데 드는 열차 비용은 웬만한 직장인 월급을 여러 달 모아야 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비용은 만만치 않았어도 유럽행 기차여행을 얼마든지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1945년 광복 직후 경의선 열차 운행은 중단됐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선로마저 파괴된 이후 남과 북은 서로 '열차 타고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한반도 남쪽을 아예 '섬'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해외여행이 유행처럼 번질 때도 '열차 해외여행'은 상상할 수 없었다. 부모 세대는 '비행기 해외여행'만 자녀 세대에 물려줬다.


2000년대 초 남북이 공동으로 복원에 착수한 경의선이 도라산역에서 북쪽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도라산 전망대에서 맑은 날 북측을 바라보면 개성시와 개성공단이 훤히 보이지만, 개성공단이 운영될 때도 철도는 연결되지 않았다.


남북관계 단절 속에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의 후속 조치로 2024년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와 도로를 철거하고 폭파하기까지 했다. 도라산역에 닿은 열차는 아직도 북쪽으로 한발짝도 더 달리지 못한 채 관광객들을 맞으며 기념사진의 배경이 되는 '쇼윈도'처럼 기다리다 서울로 돌아간다.




축사하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0일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역에서 열린 DMZ 평화 이음 열차 첫 출발 기념 '도라산역, 평화를 다시 잇다' 행사에서 축사하고 있다. 2026.4.10 [공동취재] hama@yna.co.kr


지난 4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DMZ 평화이음 열차'는 서울역에서 일산과 파주·문산을 거쳐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도라산역까지 오간다. 지난 6년 반 동안 중단됐던 관광열차 운행을 재개해 DMZ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내국인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도라산역에서 평양을 거쳐 유럽을 열차로 오가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 속에 운행을 재개한 이 열차는 언제 북쪽으로 운행 구간을 넓힐 수 있을까? 글로벌 공급망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대륙을 연결하는 '지름길 개척'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구상이 필요한 시점이다.


h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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