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사투리'·패션계 등 특정업계 넘어 공공기관도 외국어·외래어 많아
장점도 있지만 "위계질서 드러내고 신분 구분"…"공직사회선 더 신중해야"
(서울=연합뉴스) 최윤선 기자 = '컨틴전시 상황으로 점프 업 해 BEP 어치브 할 것.'
강모(28)씨는 최근 회의록을 보다가 순간 웃음이 터졌다. 상사의 말 중에 영어와 한자어를 제외하면 남는 단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씨는 "이 우스꽝스러운 문장을 남들이 보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며 "쉽게 우리말로 바꿔 쓸 수 있는데 영어로 쓰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 한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는 소위 '판교 사투리' 때문에 괴롭다는 한 직장인의 하소연이 올라왔다.
글쓴이가 '오전 미팅했을 때 세커티를 디벨롭 한 거 매리지체크해서 리셀해주시고 이슈 메컵했을 때 락앤 주세요'라는 내용의 직장 동료 문자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답하자 "대리님을 위해 조언해 드리자면 판교 사투리 잘 배워놓으세요. 이 바닥 우습게 보면 대화도 못 하거든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온라인에는 "말도 안 된다. 저렇지는 않다", "도대체 무슨 뜻이냐" 등 반응이 쏟아지면서 사연의 진위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업계를 가리지 않고 외국어·외래어를 과하게 쓰는 건 사실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 수원시의 한 대기업에 다니는 장모(32)씨는 '판교 사투리'라고 불리는 정보통신(IT)업계 종사자가 쓰는 영어 은어와 자신이 직장에서 쓰는 단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봤다.
그는 사회 초년생 시절 업무하면서 쓰는 영어 단어를 전부 익히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고 했다.
장씨는 "입사 초기에는 '액션 플랜', '덱' 등 뜻을 유추하기 어려운 단어 때문에 고생했다"며 "어느새 익숙해져 '다음 주에 미팅 어레인지 해서 지난 미팅 이후 액션 아이템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팔로업 합시다'와 같은 메시지를 아무렇지 않게 읽고 있을 때면 헛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패션업계도 '외국어 사랑'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으로 평가받는다. 패션잡지와 같은 업계 소식지에는 '댄디한 느낌', '바이브를 살려서', '비비드한 컬러', '볼드한 터치' 등 영어와 프랑스어, 한국어가 뒤섞인 표현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뒤범벅' 표현은 비단 사기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울시에 근무하는 주무관 A씨는 "이슈, 팔로우업, 리스트업, 포워딩 등의 단어는 아무렇지 않게 쓴다"며 "보도자료를 작성할 때 영어 단어를 많이 섞어 써서 관련 부서나 시의원으로부터 수정하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일터 내 만연한 외국어·외래어가 위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신분을 구분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박진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말이고 대체할 만한 더 적절한 한국어가 없을 때 무조건 영어라고 해서 배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미묘한 개념도 외국어·외래어로 세분화해서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면서도 회사에서 영어를 지나치게 많이 쓰는 건 그와 다른 차원이라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미팅 어레인지' 정도야 어떤 분야든 신입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회사와 업종에 따라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도 많이 쓰이는 실정"이라며 "이는 그 세계에 속한 고참이 신참을 길들이는, 군기를 잡는 언어로 쓰이고 마치 사원증처럼 업계 바깥사람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설명했다.
'언어감수성'을 강조하는 저서를 펴내기도 한 신지영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언어 역시 권력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며 "직장 내 상급자가 쓰는 업계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불편함을 겪다가도 어느 순간 익숙해지며 문제의식이 사라지고 따라 쓰게 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공직자는 언어 사용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박 교수는 "몇몇 부처 보도자료를 보면 행사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일부러 영어와 국어 단어를 섞어 신조어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며 "원래 의도대로 전달되지도 않고 오히려 지나친 말장난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준다"고 했다.
ys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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