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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1894~1897년 네 차례 조선을 방문하고 기행기 『코리아와 그 이웃 나라들』을 펴낸 영국의 여성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의 양반들을 백성의 고혈을 빠는 '허가받은 흡혈귀'(licensed vampires)라 불렀다.
비숍의 기록에 따르면 구한말 양반들은 프랑스제 시계와 독일식 금박 장식을 탐하고 서양 술을 즐겼다. 일부 상점에서는 감자 증류주를 숙성 코냑으로 둔갑시켜 비싸게 팔고 거품이 잔뜩 낀 탄산수를 샴페인으로 속여 단돈 1냥에 팔았다. 가짜 양주가 이미 개항기부터 판을 치고 있었던 셈이다.

[롯데칠성음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양주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친 뒤에도 서민들이 쉽게 맛보기 어려운 사치품이었다. 이런 수요를 겨냥해 등장한 것이 주정(酒精·고농도 식용 알코올)에 향료와 색소를 섞은 유사 양주였다. 부산 국제양조장이 1956년 내놓은 '도리스'가 대표적이다. 도리스는 일본 산토리에서 만든 '토리스 위스키'의 이름을 도용한 유사 위스키였는대, 선풍적 인기 속에 왜색 시비가 불거지자 1960년 '도라지'로 이름을 바꿨다.
가수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도라지' 위스키 한 잔이 바로 그 술이다. 최백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양주의 낭만이 흘렀지만, 정작 술에는 위스키 원액이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았다. 서민들은 색소폰 선율에 취하고 양주를 흉내 낸 국산 술을 마시며 진짜 위스키를 즐기는 기분을 냈다.

▲ 국산 유사 위스키 '도라지'(사진 왼쪽)와 원조 격인 일본 산토리의 '도리스'(자료사진)
그 시절 권력자들의 술상에는 고급 양주가 올랐다. 막걸리광으로 유명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청와대 관저에서는 스코틀랜드산 '로얄 살루트 21년'을 즐겼다. 1953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을 기념해 출시된 술로, 이름은 왕실에 경의를 표하는 21발의 예포(Royal Salute)에서 따왔다.
박정희는 이 술을 머리맡에 두고 아껴 마시다가 1979년 여름 청와대 참모들과의 저녁 자리에 내놓았다. 고건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은 회고록에서 "혀에 닿는 감촉과 술맛이 그만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한 잔 더 마시고 싶었지만, 박 대통령이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술병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라고 해 입맛만 다셨다고 회상했다.
그해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마련한 궁정동 안가의 마지막 술자리엔 시바스 리갈 12년산이 올랐다. 맥주(비어)에 막걸리(비탁)를 섞은 '비탁'을 직접 제조해 마실 정도로 막걸리를 즐겼던 박정희가 시바스 리갈 애호가로 기억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10·26 사건 현장검증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쏘는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 오른쪽 탁자에 시바스 리갈 위스키가 놓여 있다. [자료사진]
기득권층의 술이던 양주를 서민의 술상으로 끌어내린 주역은 '캪틴큐'였다. 롯데가 1980년 내놓은 이 술은 비싼 위스키가 부담스러웠던 대학생과 공사장 인부들이 즐겨 찾았다. 그러나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88서울올림픽과 해외여행 자유화로 수입 양주가 대중화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가짜 고급 양주의 원료로 악용되는 수모까지 겪다가 2015년 단종됐다.
초저가 양주의 효시 격인 캪틴큐가 11년 만에 돌아왔다. 과거 지독한 숙취를 감수하며 초록병을 땄던 청춘들이 공략 대상이다. 라벨 속 외눈박이 선장이 5060들에게서 아련한 옛 추억을 불러내겠지만, 그때와 입맛이 달라진 게 변수다. 위스키에 맥주를 섞어 여럿이 돌려 마시던 '양폭'(양주+맥주)은 20여년 전에 종적을 감췄고, 그 공간엔 '소맥'(소주+맥주)이 들어서 대중 음주문화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 사이 양주 마시는 풍경도 크게 변했다. 선진국 한국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은 과거 어른들이 아끼며 마시던 발렌타인 대신, 부르는 게 값인 맥캘란이나 발베니 같은 싱글몰트, 개성 강한 버번을 찾아 마신다. 술의 독특한 향과 맛, 오크통의 풍미를 따지는 깐깐한 2030 주당들과 달리, 소맥에 입맛이 길들여진 중장년층이 단지 추억을 좇아 캪틴큐를 다시 찾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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