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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규제, 중국은 국가지원…AI 반도체 패권전 격화
HBM 초격차도 안심 못해…AI 인프라 지원 패러다임 전환 시급

[연합 AI 플랫폼 생성 이미지.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을 멈췄다.
제품의 기술 우위와 생산 원가, 자율적인 수급에 의해 가격과 출하량이 결정되던 기존의 시장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를 인공지능(AI) 패권을 노리는 미국과 중국의 무한 경쟁이 대체하고 있다.
초거대 AI 모델 학습과 구동에 쓰이는 첨단 반도체는 단순한 정보통신(IT) 부품을 넘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무기가 됐다. 반도체 산업이 개별 기업 간 기술 경쟁을 넘어 국가 대항전으로 변모한 것이다.
미국은 '국가 안보'를 명분 삼아 각종 규제를 만들고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투입하며 AI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 중이다. 중국도 명운을 걸고 국가 자본을 쏟아부어 독자적인 AI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나섰다.
◇ 미국 '안보 청구서'에 묶인 첨단 AI 밸류체인
미국의 반도체법(CHIPS Act)은 자유 시장 경제의 틀을 깬 대표적 사례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 첨단 반도체 제조 시설 건립을 조건으로 527억 달러(약 75조 원) 규모의 직접 보조금과 대출을 내걸었다. 하지만 이 막대한 자금에는 이른바 '가드레일'(안전장치)로 불리는 독소 조항이 붙었다.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보조금 수령 기업은 향후 10년간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상 늘릴 수 없다. 미 상무부는 대중국 수출 통제를 통해 엔비디아의 첨단 AI 가속기와 생산 필수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의 중국 반입도 원천 차단했다. 반도체 하드웨어 단계에서부터 중국의 AI 굴기를 꺾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중국 우시와 시안에서 대규모 메모리 반도체 생산 라인을 가동 중인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는 기회비용을 치르고 있다.
글로벌 AI 메모리 수요에 발맞춰 공정 고도화가 필수적이지만, 미국의 장비 통제로 현지 공장의 가동률과 수율 관리에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이 철저히 원가와 시장 수요만 계산해 투자를 집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 72조 펀드·내수 할당…규제 뚫는 중국의 '물량전'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도 중국의 반도체 자립 시도는 거세다. 국가 자본의 무제한 투입과 자국 내수 시장 우선 할당이라는 방식을 동원해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자급률 제고를 위해 3천440억 위안(약 72조 원) 규모의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빅펀드 3기)을 조성했다. 국유은행들이 대거 참여해 시장 수익성과 무관하게 자본을 대는 구조다. 이를 통해 AI 연산의 핵심인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첨단 패키징 자립에 사활을 걸고 있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집중 지원을 받는 대표 기업은 창신메모리(CXMT)다. 첨단 장비 수입이 막히자 범용 D램 공정에 집중해 덩치를 키운 CXMT는 올해 1분기 기준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 5%를 넘어섰다. 기업공개(IPO)로 조달한 자금의 85%를 HBM 및 차세대 공정 연구개발(R&D)에 투입해 AI 메모리 시장 진입마저 노리고 있다.
텐센트, 바이두 등 자국 AI 빅테크들이 자국산 메모리를 의무적으로 구매해주는 강력한 내수 시장 덕분에, CXMT는 원가 경쟁력이 떨어져도 공장을 풀가동하며 기술을 축적하는 이례적인 생태계를 구축했다.
중국은 반도체 공정의 척추인 노광장비 국산화 강행군도 이어가고 있다.
EUV 장비 도입이 막히자 상하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장비(SMEE)를 중심으로 심자외선(DUV) 장비 개발과 양산 적용을 밀어붙이고 있다. EUV와 기술 격차가 크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의 제재 실효성을 반감시킬 수 있는 변수다. 대규모 내수와 전폭적인 국가 자본 지원으로 기술 격차를 좁히는 전략이 현실화하고 있다.
◇ 투자세액공제에 기댄 한국…천문학적 투자비 '압박'
미중 양국이 'AI 국가대표' 육성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HBM 등 핵심 AI 메모리 시장을 쥐고 있는 한국 기업의 체감 온도는 사뭇 다르다.
최근 5년간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등 주요국이 자국 반도체 산업에 약속한 현금성 지원금만 1천374억 달러(약 196조원)에 달한다.
반면 한국의 지원책은 시설 투자금 일부를 사후에 법인세 등에서 깎아주는 투자세액공제가 중심이다. 여야 합의로 공제율이 상향됐으나 기업에 적자가 발생해 낼 세금이 없으면 지원 효과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AI 반도체 시대의 투자는 과거와 단위 자체가 다르다. SK하이닉스가 짓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 건설에만 120조원 이상이 투입되며, 삼성전자 역시 수백조원을 쏟아부어야 한다.
최첨단 미세 공정과 패키징 라인을 적기에 구축하려면 막대한 초기 현금이 필요하지만, 이를 개별 기업의 영업 현금 흐름만으로 감당하기엔 한계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9일 청와대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6.6.29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xyz@yna.co.kr
AI 패권 전쟁의 대리전 양상이 된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알아서 초격차를 유지하면 된다'는 식의 과거 프레임은 한계에 직면했다.
아무리 압도적인 HBM 기술력을 확보했더라도, 경쟁국 후발 주자들이 국가 차원의 막대한 자본과 규제 장벽을 등에 업고 추격해 올 경우 1위 수성을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결국 정부와 국회가 반도체를 단순한 수출 1등 효자 품목을 넘어 AI 시대의 국가 안보 자산으로 재정의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직접 보조금 지급 제도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용수·전력망 등 필수 인프라 구축을 국가가 직접 책임지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눈여겨봐야 할 때다.
president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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