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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신종근 제작 AI 이미지]
우리 술의 역사에서 고려는 양조 기술이 크게 융성한 시기로 꼽힌다. 귀족과 사찰을 중심으로 고려청자가 구워지고 불교 미술과 공예가 절정에 이르던 무렵, 술 빚는 솜씨도 함께 무르익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1123년 개경을 다녀간 뒤 남긴 견문록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의 술과 연회 풍습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서긍은 고려 사람들이 술을 즐기며 왕실의 술은 맛이 진하다고 적었는데, 이런 기록들은 당시 고려가 중국의 양조 기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기만의 풍미를 지닌 명주를 빚어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무렵의 술 가운데 왕실에서 사시사철 빚어 마셨다고 전해지는 것이 황금빛 술 아황주(鴉黃酒)다.
아황주라는 이름은 까마귀 아(鴉)에 누를 황(黃)을 쓴다. 글자 그대로 풀면 까마귀 깃털처럼 짙고 어두운 기운이 감도는 노란빛이라는 뜻이다. 흔히 보는 맑고 연한 약주와 달리, 잘 익은 곡물의 진액을 응축해 놓은 듯 짙고 오묘한 색을 띤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발효 기간이 짧으면서도 술빛이 다른 어떤 약주보다 진한 황색을 내고 단맛이 강한 것이 이 술의 특징으로 전한다.
◇ 문헌에 남은 흔적, 끊어진 명맥
아황주가 어느 문인의 술상에 올랐는지를 두고는 고려 후기 문신 이규보(1168~1241)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남긴 이규보는 술을 소재로 한 시문을 여럿 지은 애주가로, 후대에 술을 의인화한 가전체 문학 '국선생전'(麴先生傳)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려 상류층이 곡물을 아낌없이 들여 빚은 고급 약주를 즐겼다는 정황은 이런 문인의 기록에서 두루 엿보인다.
이토록 손이 많이 가던 고급 명주들은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유교적 검약을 앞세운 조선 사회에서, 막대한 곡물을 쏟아부어야 하는 까다로운 술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아황주의 제조법은 조선 전기의 조리서인 '산가요록'(山家要錄)과 '수운잡방'(需雲雜方) 같은 문헌에 몇 줄 기록으로만 남았을 뿐, 실제로 빚어 마시는 술로서의 명맥은 오랜 세월 끊겼다.
참고로 '산가요록'은 1450년 무렵 어의 전순의가 지은 현존 최고(最古) 수준의 종합 농서이자 조리서로, 230여 종의 조리법과 60여 종의 술 빚는 법을 담고 있다. '수운잡방'은 16세기 안동 사대부 김유가 쓴 조리서다. 두 책 모두 오랫동안 잊혔다가 20세기 후반에야 학계에서 재발굴돼 우리 옛 음식과 술을 복원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아황주가 다시 빛을 본 것은 2000년대 후반이다. 농촌진흥청은 '우리 술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옛 문헌 속에 잠들어 있던 전통주를 되살리는 작업을 벌였고, 그 결과 2009년 아황주를 복원했다. 같은 시기 고려 청주 계열인 녹파주(綠波酒)도 함께 되살아났다. 녹파주가 거울에 비친 푸른 물결처럼 맑은 빛을 낸다면, 아황주는 규방 여인의 이미지에 견줄 만큼 진한 황색과 강한 단맛을 지녔다는 것이 농촌진흥청의 설명이다.
복원은 한지에 적힌 옛 계량을 현대 단위로 환산하고, 온도와 습도를 통제하며 배합을 거듭 실험하는 과정을 거쳤다. 농촌진흥청은 2010년 아황주 제조 기술의 특허를 출원하고, 그해 전통주 제조업체에 기술을 이전해 상용화의 길을 열었다.
이 복원의 배경에는 제도적 뒷받침도 있었다. 정부는 2010년 2월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며 전통주 산업 육성의 틀을 마련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맥이 끊어진 조선시대 360여 종의 술을, 창업자나 초보자도 따라 빚을 수 있도록 정리하고 현대적으로 응용하게 하려는 흐름 속에서 아황주 복원이 이뤄진 셈이다.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 파주에서 이어가는 맛
복원된 아황주의 명맥을 잇는 대표적인 곳이 경기도 파주의 '최행숙 전통주가'다. 농촌진흥청에서 기술을 이전받은 이 양조장은 파주 일대에서 난 찹쌀을 써서 문헌 속 아황주를 프리미엄 약주로 상품화했다.
다시 태어난 아황주는 인공 감미료를 쓰지 않고 쌀과 누룩, 물만으로 빚는다. 그럼에도 꿀을 머금은 듯한 묵직한 단맛이 뚜렷한데, 물의 양을 줄이고 밑술에 덧술을 거듭 더하는 다단 발효로 쌀의 당분을 끌어 올린 결과다. 알코올 도수는 17도 안팎으로 낮지 않지만, 거친 알코올 맛은 가려지고 잘 익은 참외나 사과를 떠올리게 하는 과실 향이 감돈다.
이 양조장은 아황주와 함께 '미인'(美人) 시리즈 탁주와 약주도 함께 낸다. 아황주를 복원하며 쌓은 미생물 제어 기술이 반영된 술로, 찹쌀 본연의 은은한 단맛에 부드러운 산미를 얹어 텁텁함을 덜어냈다. 이런 균형은 전통주가 지루하다고 여기던 젊은 소비자에게도 어렵지 않게 다가간다.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크래프트 주류 시장이 커지면서, 대량 생산된 술보다 이야기가 담긴 술을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아황주와 미인 시리즈는 옛것의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 땅의 곡물과 누룩만으로 디저트 와인에 견줄 풍미와 색을 만들어낸 시도는, 세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한국형 리큐르(K-Liqueur)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청자 잔에 담긴 아황주의 황금빛을 들여다본다. 800년 전 개경의 누각에서 문인들이 마주했을 그 색과 향이, 오늘의 식탁 위에서 다시 숨 쉬고 있다. 잊혔던 술의 맥락을 문헌에서 찾아내 현대의 잔으로 옮겨 담는 일은, 과거에 대한 예우인 동시에 우리 술의 다음 장을 여는 작업이기도 하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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