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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원전·전력망까지…AI 팩토리 핵심 퍼즐 점검
'피지컬 AI' 제조 동맹 본격화…엔비디아 종속은 과제

(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5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삼겹살 음식점 '형님 저요'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삼소(삼겹살·소주) 회동'을 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6.5 mon@yna.co.kr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요즘은 무엇이든 앞에 K만 붙이면 인기를 얻는다. 나를 K-젠슨이라고 불러달라."
최근 방한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기존의 빅테크 수장들과 달리 4박 5일 동안 치킨 먹방에 PC방, 야구장, 서울대 방문 등 마치 슈퍼스타가 공연하듯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까지 드러냈다.
이 같은 젠슨 황 CEO의 행보는 엔비디아가 한국을 인공지능(AI) 인프라와 제조 협력의 핵심 거점으로 보고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 시가총액 1위 기업 수장이 단순히 사업 목적으로 특정 국가에 이처럼 오래 머무는 것은 IT 업계에서도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 등 국내 재계 핵심 수장들과 연쇄 회동은 엔비디아의 한국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평가된다.
글로벌 AI 패권 경쟁이 소프트웨어를 넘어 반도체, 전력, 데이터센터 등 물리적 인프라 확보로 확대되는 흐름 속에 젠슨 황 CEO는 한국에 절호의 기회이자 리스크를 함께 던져준 셈이다.
◇ SK·삼성과 밀당…HBM 공급망 주도권 노린다
엔비디아 입장에서 시급한 상황은 당연히 고대역폭 메모리(HBM) 수급이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인 '블랙웰'(Blackwell)과 '루빈'(Rubin)에 들어갈 HBM을 제때 충분히 확보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단순히 물량을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 자사 중심의 가격 결정력을 유지하는 것도 관건이다.
이번 방한에서 황 CEO는 특유의 노련한 협상력을 발휘했다.
그는 최태원 회장과 만나 차세대 HBM 조기 공급 로드맵과 'AI 팩토리' 공동 구축 구상에 합의하며 'AI 동맹'을 공고히 했다. 최 회장과 식사 자리에서는 "HBM을 더 달라"고까지 했다.

(서울=연합뉴스) 서대연 기자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8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난 뒤 브리핑하고 있다. 2026.6.8 dwise@yna.co.kr
동시에 경쟁사인 삼성전자의 전영현 대표이사를 만나 7·8세대 HBM인 HBM4E와 HBM5의 공급을 논의했다.
현재 HBM 시장의 주도권은 SK하이닉스가 쥐고 있지만 엔비디아로서 단일 업체에 공급망을 맡긴다는 것은 향후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황 CEO는 이번 방한에서 SK하이닉스와 '깐부 동맹'을 과시하면서도 삼성전자[005930]와 협상 창구를 열어두는 모습을 보였다.
SK하이닉스[000660]와 삼성전자의 HBM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엔비디아의 HBM 칩 수요를 감당하는 동시에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HBM 협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가 HBM 시장 1위 파트너이지만 삼성전자가 있어야 가격·물량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이번 방한은 양쪽과 협력하되 엔비디아가 이를 주도하겠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 'AI 팩토리'엔 원전·송배전망 필요…한국 부각
IT 업계 전문가들은 HBM 수급 못지않게 젠슨 황 CEO가 '전력 인프라'에도 관심을 가진 걸로 보고 있다.
구글 등 글로벌 빅테크들이 AI 데이터센터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24시간 풀가동할 수 있는 막대한 전력 확보에 애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을 보면 이런 우려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칩 'B200' 1개의 전력 소모량은 약 1천W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 칩을 8개 묶은 서버 시스템 'DGX B200' 1대는 최대 14.3kW(킬로와트)급으로 단일 시설이 수백MW에 가까운 전력을 소모하게 된다.
생성형 AI 서비스가 이용자에게 답변 하나를 내놓는 데 들어가는 전력은 일반 검색엔진 대비 10배 이상 많다는 분석도 잇따르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수년 안에 국내에 도입될 GPU가 수십만 장에 이르면 단순 계산만으로도 수 GW(기가와트)급 추가 전력 수요가 발생할 수 있다"고 추산한다.
국내에 들어오는 엔비디아의 GPU 20만∼30만장을 기준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3∼4GW 안팎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추산이 나온다. 이는 대략 원전 3∼4기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준으로 'AI 팩토리' 확산은 국가 전력 수급 구조까지 바꿀 수 있다.

(성남=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8일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 1784 사옥을 방문해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6.8 xanadu@yna.co.kr
문제는 태양광이나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발전량이 많지 않고 안정적이지 못해 AI 데이터센터와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황 CEO의 'AI 팩토리' 실현에 적합지다.
한국은 비교적 좁은 국토에 산업용 송배전망이 촘촘하게 깔려 있고, 전체 발전량의 30% 이상을 원자력이 담당하며 80% 안팎의 가동률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매일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AI 팩토리'를 돌릴 만큼 전력량을 가진 원전을 보유하고 탄탄한 송전 인프라까지 갖춘 국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한 AI 스타트업 관계자는 "엔비디아엔 고품질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원전과 긴밀한 송배전망을 갖춘 한국이 아시아 최고의 'AI 팩토리' 거점 후보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첨단 제조업의 강자 한국…'피지컬 AI' 전초기지 부상
젠슨 황이 이번 방한에서 현대차그룹, 두산 등 제조 대기업들과도 만난 것도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엔비디아가 대형언어모델(LLM)과 AI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선점했지만 이제는 현실 세계에서 직접 움직이는 '피지컬 AI'(Physical AI·로봇,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상 공간에서 학습한 데이터를 실제 공장·도로·물류 현장의 정밀한 기계 제어로 연결하려면 고도화된 제조업 파트너가 필수적이다. 황 CEO가 이번 방한에서 현대차, 두산, 국내 로봇·자동화 기업들을 찾은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차[005380]그룹은 이미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에 엔비디아의 3D 설계·시뮬레이션 플랫폼 '옴니버스'(Omniverse)를 도입해 현실 공장을 가상에 그대로 옮긴 디지털 트윈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8일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 본사에서 KIA의 전기차 PV-5에 탑승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2026.6.8 [현대자동차·기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현대차는 초당 1천조 번 연산이 가능한 차세대 차량용 칩 '드라이브 토르'(Drive Thor) 도입도 검토하고 있어, 자율주행·인포테인먼트·차량 내 AI 기능을 엔비디아 플랫폼과 밀착시키는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두산로보틱스 등 국내 정밀 로봇 기업들 역시 엔비디아 로봇 플랫폼 '아이작'(Isaac)에서 충돌 방지, 경로 계획, 정밀 제어 알고리즘을 훈련하고 있다. 실제 공장에 로봇을 투입하기 전에 가상환경에서 수십만∼수백만 회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방식으로 '피지컬 AI'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핵심 인프라다.
이처럼 황 CEO에게 한국 제조업 생태계는 피지컬 AI 기술을 실제 산업 현장에 적용하고 검증할 수 있는 최적의 시험장이자 동맹 후보군이다.
한국은 조선부터 자동차, 배터리, 반도체, 정밀기계, 로봇까지 고부가가치 제조업이 밀집해 있는 구조라서 하나의 AI 플랫폼을 여러 산업에 적용하기 쉽다는 점도 매력으로 꼽힌다.
◇ '친근한 젠슨 형'이지만…엔비디아 플랫폼에 종속 우려
마포구 고깃집에서 소맥 회동, 홍대 거리 방문, 프로야구 시구 등 황 CEO의 파격적이고 소탈한 행보는 단순한 '팬 서비스'로만 보이진 않는다.
한국 내 대중 친화적인 이미지 제고를 통해 기업 브랜드 영향력을 높이고, 정부와 정치권, 산업계 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들려는 행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젠슨 황 CEO가 이번 방한에서 국내 주요 기업 수장들과 형성한 인적 네트워크는 AMD, 인텔 등 경쟁사나 자체 신경망처리장치(NPU)를 개발하려는 엔비디아 반대 진영에 보이지 않는 방어막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현재 엔비디아는 전 세계 AI 가속기 시장의 90%가량을 점유한다는 추산이 나올 만큼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7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6 프로야구 KBO리그 키움 히어로즈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에 앞서 시구를 마친 뒤 시타자로 나선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과 함께 퇴장하고 있다. 2026.6.7 yatoya@yna.co.kr
이에 따라 미국 법무부와 유럽연합(EU) 등 주요 규제 당국의 반독점 조사 및 검토 대상에 올랐고, AI 오남용과 빅테크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둘러싼 '플랫폼 책임론'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국내 기업들 또한 황 CEO의 러브콜에 고민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GPU와 AI 소프트웨어, AI 생태계를 모두 쥔 플랫폼 사업자로서 엔비디아가 한국을 전략 요충지로 삼을수록 국내 기업들은 엔비디아의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에 종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방한은 엔비디아가 추진하는 AI 인프라 및 산업 생태계 전략에 한국을 본격적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국내 기업들 입장에서는 AI 혁명의 최전선에서 사업 기회를 선점할 수 있지만 첨단 제조 실증 데이터와 AI 서비스 인프라를 단일 외국 빅테크 플랫폼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는 위험도 떠안게 됐다.
국내 IT 기업의 한 임원은 "특정 기업에 국가 기반 인프라가 묶이면 데이터 주권과 기술 자립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정부와 산업계가 규제와 육성의 균형점을 찾아 엔비디아와의 협력이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president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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