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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팔 마피아가 설계한 알고리즘 속에서 움직이는 인류
조지 오웰 소설 '1984'가 경고한 빅브라더 등장 우려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어린 시절 소년 잡지를 읽다 보면 미래에는 인류가 상상조차 어려운 첨단기술을 향유하며 편하게 살 거란 글들이 실렸던 기억이 난다. 거짓말 같은 상상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사람이 개인용 통신단말기를 들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소통한다. 궁금한 건 컴퓨터와 대화하며 해결한다. 화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진짜 같은 가상현실 게임을 즐긴다. 로봇이 사람 대신 공장에서 일하고 집을 청소한다. 자동차는 전기를 동력으로 쓰고 사람이 운전 안 해도 스스로 주행한다. 훼손된 팔다리나 장기를 인공 신체로 대체한다.
당시 느꼈던 감정은 '이런 꿈 같은 세상이 오면 정말 좋겠다'는 기대와 '적어도 수백 년은 더 걸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불신이 뒤섞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저런 일들이 실제 일어나는 세상에 산다. 공상과학소설(SF) 같던 이야기들이 당연한 일상이 됐거나 상용화에 들어갔다.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니 이젠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 시뮬레이션이란 이론까지 등장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오는 2045년에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할 것으로 봤다.

지난 2000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에 있는 페이팔 본사에서 페이팔 최고경영자 피터 틸(왼쪽)과 창립자 일론 머스크가 페이팔 로고를 배경으로 함께 찍은 사진.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DB 금지]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첨단기술 발전 속도는 어제와 오늘이 다를 정도다. 그에 맞춰 우리 생활 양식과 가치관도 초고속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 인류 전체의 사고와 생활 방식을 이처럼 송두리째 바꾸는 사람들이 극소수란 사실을 우리는 평소 인지하지 못한다. 특히 '페이팔 마피아'(PayPal Mafia)로 불리는 특정 집단이 지금 사실상 모든 변화를 주도하고, 대다수 인류는 그들이 만드는 규칙 안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오싹한 기분마저 든다. 지금 세상은 페이팔 마피아가 설계한 체스판 위에서 돌아가고 있으며, 필자처럼 평범한 다수는 새로운 규칙을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가는 '체스 말'일지 모른다.
페이팔 마피아는 2000년대 초반 온라인 결제 시스템 '페이팔'을 함께 창업하고 키운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뜻한다. 2007년 경제 전문지 포춘이 붙여준 별명이다. 이들은 20여년이 지난 지금 초강대국 미국의 산업·경제계를 넘어 정치 시스템까지 사실상 장악했다. 그리고 이젠 인류 전체 시스템을 자기들 방식으로 고치고 있다. 주요 면면을 보면 마피아란 별명이 이해가 간다. 페이팔 마피아의 '대부'로 불리는 피터 틸 팔란티어 창업자, 테슬라와 스페이스X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유튜브를 공동 설립한 채드 헐리와 스티브 첸, 링크드인을 만든 리드 호프먼 등이다.
이들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의 행정부 요직에까지 진출해 통치 체계마저 개조 중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축이라 할 정도다. 신설된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머스크가 맡았고, 페이팔 경영진 출신 데이비드 색스는 'AI 차르'와 백악관 과학기술자문위원장을 겸직한다. 막후에서 이들의 관가 행을 지원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세는 '대부' 틸이다. 틸은 통치 이념을 제공하고 조각에도 참여했다. 특히 측근인 JD 밴스를 부통령에 꽂아 넣었다. 밴스는 옛 직장 상사였던 틸로부터 천문학적 정치자금을 받으며 권력 이인자까지 올랐다. 무엇보다 틸은 정보분석 기업 팔란티어를 통해 군과 정보기관 운영 체제를 장악했고, 연방정부 데이터를 통합해 사회 전체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DB 금지]
이란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페이팔 마피아가 전쟁 문법마저 새로 쓰고 있음을 입증했다. 미군이 작전 시작 24시간 만에 목표물 1천개를 초토화하는, 가공할 공격력을 보인 건 팔란티어의 공격 좌표 플랫폼 덕이었다. 전략·전술 중심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넘어가는 분기점으로 평가될 만하다. 무기는 안 만들지만, 방위산업체로 인식되는 팔란티어는 록히드마틴 같은 기존 방산 기업의 가치를 시장에서 뛰어넘었다. 머스크의 '스타링크' 위성도 우크라이나 드론 부대의 위력을 배가하며 본격 'AI 무인 전쟁' 시대를 열었다. 러시아 군이 드론을 교란하려 쏘는 방해 전파는 스타링크 앞에서 무용지물이 됐다. 인간 갈등 해결 방식 중 가장 극단적이자 최후 수단인 무력마저 페이팔 마피아의 통제 아래 들어간 듯하다.
2026년을 사는 우리는 페이팔 마피아가 만든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는 일상이 마비될 지경이다.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정보 교환, 금융 거래, 여가 보내기, 관계 맺기, 맛집 찾기까지 종일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한다. 당장 유튜브 서비스만 끊겨도 금단 현상에 빠질지 모른다. 인류가 타인과 소통하고 지식을 얻고 여가를 보내는 방식의 표준을 그들이 통제한다. 책과 신문 등으로 정보를 얻던 인류는 AI 에이전트와 유튜브 등을 통해 지식과 뉴스를 접한다. 세계 여론에 가장 영향력이 큰 매체는 거대 방송·신문사인 폭스, BBC, 뉴욕타임스 등이 아니라 'X'이다. 오락 프로그램을 비롯한 볼거리마저 유튜브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비된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DB 금지]
소설과 영화 속 상상력이 세월이 지나 현실화하는 사례를 적잖이 봤다. SF 영화에선 미래 지구를 통치하는 주체를 대체로 기업으로 설정한다. 권력 정점인 통치자는 과거 왕이나 종교 지도자였다가 현대에는 대통령 또는 의회 다수당 총리로 변천했다. 앞으론 전통적 권력은 쇠퇴하고 물적 네트워크를 독점한 거대기업이 정부를 대신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기술 엘리트'의 행보에서 이미 그 징조가 엿보인다. 페이팔 마피아는 이미 거대한 국가 시스템 작동 원리를 바꾸고 있고, 나아가 인간의 행동 양식마저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짜놓은 코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이 떠오른다. '빅 브라더'가 감시하는 가상 디스토피아를 그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결국 현실이 되는 걸까.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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