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닫힌 문 앞에서 양복쟁이도 눈물…목동 가나다문구의 42년 추억

입력 2026-05-26 05:55:00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주말도, 밤낮도 없이 느티나무처럼 자리 지켜온 어린이들의 우주


폐업 소식에 학부모 된 그때 꼬마들 아쉬움 물결 "키워주셔서 감사"




'가나다문구'가 영업하던 때 모습

[박미선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양수연 기자 = "그 옛날 유리창 너머의 인형 세트를 유리에 딱 붙어서 바라만 보던 기억이 엊그제 같아요. 오백원짜리 둘리 지우개를 사고서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는데…."


서울 양천구 목동초등학교 앞을 40년 넘게 지켜온 '가나다문구'가 폐업한다는 소식에 어릴 적부터 이곳을 들락거렸다는 주민 남모씨는 박연배(76)·김동심(75) 사장 부부에게 아쉬움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썼다.


"동네 입구의 크고 오래된 느티나무처럼 정겨운 문방구가 없어진다는 소식에 요사이 마음이 헛헛했습니다…이 동네 많은 어린이에게 오랫동안 한결같이 계셔주셔서, 동네를 지키고,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목동초 학생들 30여명은 분홍색 하드보드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마음을 적어 문방구 앞에 놓았다.


"동네를 지나가며 자주 보았던 익숙한 풍경의 일부였는데 이제는 이 문구점이 없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게 되겠네요"(6학년 임모양)


"가나다문구점을 가며 행복했습니다. 안 가시면 안 될까요?"(6학년 이모군)


"아저씨 오래오래 건강하세요"(3학년 박모군)




'가나다문구'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한 주민이 사장님에게 쓴 편지

[박미선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실내화, 체육복, 불량식품, 포켓몬 카드, 공책, 야구공, 오카리나….


지난 24일 오후 기자가 가나다문구 앞에서 만난 학생들은 어떤 물건을 자주 샀는지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이달 21일 폐업한 문구점은 간판도 사라지고 내부 수리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문구점을 기억하는 주민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2014년 목동으로 이사한 이후 줄곧 문구점을 애용했다는 이승현(18)군은 "주인 할아버지가 저랑 같이 키움 히어로즈 팬이었다"며 "2022년 겨울 키움이 한국시리즈에 갔을 때 가게 안에서 옛날 TV로 야구 경기를 함께 본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이군은 "폐업하실 때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약간 눈물이 났다"며 "지난번에는 양복을 입으신 어떤 분이 가게 앞에서 눈물 흘리고 가신 걸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류영준(18)군은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실내화가 찢어지면 무조건 여기로 사러 왔다"며 "목동초 앞 문방구 세 곳 중 가나다문구가 제일 오래 있었는데 문을 닫는다고 하니 우리 세대가 끝난 느낌"이라고 아쉬워했다.


한때 포켓몬 카드를 사러 매일 문구점을 들렀다던 박제윤(14)군은 "가게에 '폐점 정리'라고 붙어있어서 들어갔더니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이제 힘드니까"라고 하셔서 마음이 안 좋았다"고 말했다.




24일 오후 '가나다문구'가 폐업한 것을 보고 이야기 나누는 학생들

[촬영 양수연]


박연배·김동심씨 부부는 1984년부터 가나다문구를 운영해왔다.


인천에서 인형 제조사업에 실패한 뒤 남은 500만원을 쥐고 서울로 올라와 목동초 앞 30㎡(9평)짜리 문구점을 인수한 게 시작이었다.


지금은 고가의 아파트 단지와 학원들이 즐비하지만 당시만 해도 일대가 논밭뿐이었다. 오목교 근처에는 판자촌도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부부는 묵묵히 학교 앞을 지켰다.


특히 박씨가 "애들은 다 애들"이라며 문구점을 찾는 아이들을 아꼈다.


'꾀돌이' 같은 불량식품 이름을 따 장난스러운 별명을 지어주고, 실내화를 하나 사면 사탕을 덤으로 쥐여주며 늘 따뜻하게 맞았다.


딸 박미선(50)씨는 일주일 내내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문구점을 지키던 부모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명절 당일 하루를 빼고는 일 년 중 문을 닫는 날도 없었다.


미선씨가 "주말에는 안 하셔도 되지 않느냐"고 만류해도 부모님은 "그래도 애들이 온다. 오는 애들이 있으니까 나가야 한다"며 문을 열었다.




'가나다문구' 내부

[박미선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하지만 가나다문구도 '학교 앞 문방구'가 사라지는 흐름을 피하긴 어려웠다.


최근에는 도화지, 크레파스 등 준비물을 학교에서 일괄 지급하고 인근에 대형 생활용품점까지 들어서며 장사가 눈에 띄게 어려워졌다.


아내 김씨가 작년에 간 수술을 받은 뒤 피로감이 심해지는 등 건강이 악화하자 결국 박씨는 오랜 고민 끝에 폐업을 결단했다.


딸 미선씨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부모님이라고 했다.


그는 "어릴 때는 부모님이 문구점을 하는 게 부끄럽고 싫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문방구가 부모님의 생활 터전이고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해오신 게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목동초 학생들이 하드보드지를 마련해 부모님께 전한 말들을 읽으며 '우리 엄마 아빠가 참 잘 사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며 뭉클해했다.




'가나다문구'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목동초등학교 학생들이 남긴 글들

[박미선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국가데이터처와 한국문구유통업협동조합 등에 따르면 전국의 문구용품 소매점은 2005년 2만925개에서 2015년 1만1천735개로 절반이 됐고, 지난해 기준으로는 4천여개 밖에 남지 않았다.


seele@yna.co.kr



인기상품 확인하고 계속 읽어보세요!

5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연합뉴스 콘텐츠 더보기

해당 콘텐츠 제공사로 이동합니다.

많이 본 최근 기사

관심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