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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후추, 정향과 함께 세계 3대 향신료로 꼽히는 계피는 인류의 역사에서 언제나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스리랑카와 인도 남부 등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상록수 열대식물인 녹나무과 계피나무의 껍질을 벗겨 건조한 이 붉은 갈색의 향료는,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스파이스' 중 하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방부 처리하는 신성한 의식에 쓰였고, 중세 유럽에서는 황금과 맞바꿀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방부 효과와 더불어 특유의 강렬한 향취 덕분에 계피는 음식의 맛을 내는 식재료를 넘어, 당대 귀족들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가장 관능적인 유혹의 향기였다. 하나의 감각 안에서 매콤함과 달콤함, 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향료. 바로 계피(桂皮)다.
이토록 귀한 향신료가 우리나라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계피는 자생할 수 없는 열대 기후의 작물이기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고대부터 왕실과 최고위 귀족층만이 누릴 수 있는 극소수의 사치품이었던 셈이다. 신라 시대 해상 무역을 통해 실크로드를 거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시대를 지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사신을 통해 들여오거나 역관들의 무역을 통해 아주 제한적으로 유통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연회나 제례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으며,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내어놓는 수정과의 핵심 재료로 쓰였다. 곶감의 단맛과 잣의 고소함에 계피의 매운맛을 더한 수정과는, 단순히 식후에 마시는 음료를 넘어 단맛과 매운맛의 완벽한 균형을 추구했던 조선 양반들의 고급스러운 마실 거리였고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계피가 우리 역사에서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탁월한 약성(藥性)에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계피에 대해 "성질이 몹시 열(熱)하고 맛은 달고 매우며 독이 조금 있다. 속을 따뜻하게 하고 혈맥을 잘 통하게 하며, 간과 폐의 기를 고르게 한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향신료이자 약재로서 계피가 가진 이 '따뜻한 치유의 힘'은 훗날 우리 술과 만나며 더욱 매력적이고 기능적인 형태로 진화하게 된다. 약재로서 계피의 쓰임새는 자연스럽게 술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조선 시대에는 술을 취하기를 위한 기호품이 아니라, 병을 다스리고 기력을 보충하는 약주로 여겼다. 쌀과 누룩으로 빚어낸 맑은 술이나 독하게 내린 소주에 약재를 침출시키는 방식은 선비들 사이에서 고급스러운 음주 문화로 깊이 자리 잡았다. 과거 계피가 들어간 대표적인 명주로는 평양의 감홍로나 전주의 이강주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술들은 계피 특유의 짙은 향이 자칫 비릿할 수 있는 전통 누룩의 냄새를 완벽하게 잡아주는 동시에, 강력한 항균 작용으로 술의 보존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또한 마셨을 때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기능적인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했다. 계피는 담백한 곡물로 빚은 우리 술에 강렬하고 이국적인 풍미를 더해주는 가장 훌륭하고 귀한 부재료였다.

[신종근 제공]
과거 왕실과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계피술은, 현대의 양조가의 손끝에서 'K-리큐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활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각 양조장의 뚜렷한 철학과 관점을 담아 계피라는 향료를 기존과는 다른 질감과 도수의 술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개성 넘치는 계피술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구전통주가 빚어내는 '주신주'와 '돌멩이'는 그 이름부터 묵직하고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화려한 수식어를 덜어낸 이 두 술은 쌀을 맑게 증류한 원액에 계피를 직접 침출해 빚어낸 정통 증류식 소주의 문법을 따른다. 특히 알코올 도수 53도에 달하는 고도주 '주신주'는 잔에 코를 대는 순간 알코올의 타격감과 함께 짙고 묵직한 계피 향이 훅 치고 들어온다. 조심스레 입에 머금으면 혀를 조이는 스파이시한 매운맛이 입안을 강타하지만, 이내 증류식 소주 특유의 은은한 쌀의 단맛이 화끈거리는 식도를 다독이며 길고 깊은 '우디'(Woody)한 나무 잔향을 남긴다. 인공적인 첨가물 없이 재료 본연의 풍미만으로 묵직한 바디감을 구현해 냈기에, 상온에서 스트레이트로 조금씩 입술을 축이며 음미하기 좋다. 반면 같은 제법으로 침출하지만 알코올 도수를 25도로 대폭 낮춘 '돌멩이'는 직관적이고 거칠어 보이는 이름과 달리 한결 섬세한 느낌을 준다. 53도의 뜨거운 작열감이 부담스러운 이들도 기분 좋게 계피 본연의 알싸함과 쌀의 구수한 곡물감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세계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는 스리랑카산 시나몬(실론 시나몬)을 사용해 동서양의 맛을 절묘하게 엮은 한통술이노베이션의 탁주와 증류주도 있다. 알코올 도수 16도의 '시나몬 탁주'는 찹쌀누룩인 이화곡을 사용했으며 찹쌀과 멥쌀을 오랜 시간 발효해 얻은 걸쭉하고 뽀얀 밑술에 스리랑카산 시나몬의 섬세한 향을 덧입혔다. 탁주치고는 16도라는 제법 높은 도수임에도 불구하고, 텁텁함 없이 매끄럽게 넘어가 크리미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물을 전혀 타지 않은 탁주라는 점도 매력이다. 8도의 109막걸리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말살하려 했던 삽살개를 복원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로 진행됐으며 판매 금액의 1%를 유기견 보호센터에 기부하고 있다. 눈처럼 새하얀 누룩인 설향곡과 시나몬으로 빚으며 21일 동안 발효하고 100일 저온숙성을 했다. 25도의 '시나몬 증류주'는 시나몬 탁주를 숙성한 후 청주를 떠서 직화증류방식으로 증류하였으며 스리랑카산 시나몬 특유의 섬세한 향취를 투명하게 응축해 냈다.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한국형 수제주류를 표방하는 제이1농업회사법인의 시에가(SIEGA) 시나몬이라는 계피술은 쌀 증류 원액과 주정을 베이스로 하여 시나몬 합성 향료를 배합해 만든 알코올 도수 22도의 술이다. 이러한 선택은 철저히 세련된 바(Bar) 문화와 칵테일 베이스, 그리고 가볍고 경쾌한 파티 문화에 어울리도록 기획된 실용적인 결과물이다. 잔에 따랐을 때 일렁이는 맑고 투명한 액체는 시각적으로 매끄러우며, 입에 머금으면 전통주 특유의 복잡하거나 텁텁한 맛 대신 시나몬 특유의 경쾌하고 달콤한 풍미가 터져 나온다. 22도라는 도수는 독한 타격감보다는 부드러운 목 넘김에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수천 년의 시간 동안 험난한 바다를 건너고 실크로드를 넘어 우리에게 당도했던 매혹의 향료, 계피. 조선 시대 한의학의 약재로 쓰이며 민중의 기력을 보충하고, 양반가 연회의 풍미를 더해주던 이 유혹적인 향은 이제 현대의 수제 양조가들을 만나 'K-리큐르'의 지평을 눈부시게 넓히고 있다. 53도의 묵직한 타격감을 자랑하는 정통 증류주부터, 스리랑카산 시나몬으로 이국적인 풍미를 품은 16도의 부드러운 탁주, 그리고 하이볼 베이스로 완벽하게 변신하는 22도의 트렌디한 전통주까지 계피가 빚어낸 이 우리 전통주의 진화는 경계가 없다. 낡은 전통의 틀을 깨고 저마다의 개성으로 무장한 채 세계인의 미각을 사로잡을 이 향기로운 여러 술의 비상을, 계피술 한 잔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도 좋은 문화 체험이다. 그만큼 세계 시장에서 'K-리큐르'의 나아갈 길은 쭉쭉 뻗어갈 것이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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