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봉

미담의 반전...

입력 2026-05-27 0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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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본 ‘회장님 미담’의 반전, 그리고 씁쓸한 요즘 나의 일상

얼마 전에 인터넷 글을 읽다가 꽤 신선한 미담을 하나 발견했다.

어느 대기업 회장님이 참석한 미팅 자리였는데, 구석에 앉아 있던 협력업체 말단 직원이 조심스럽게 현장의 애로사항을 건의했다고 한다.

주변 임원들은 눈치를 주는데, 회장님은 묵묵히 들으면서 수첩에 그 내용을 직접 메모하더란다.

다들 높은 사람 특유의 ‘형식적인 제스처’겠거니 생각했는데, 며칠 뒤에 그 말단 직원 자리로 직접 전화를 걸어서 "지난번 말한 거 실무 부서에 확인해 보니 이렇게 처리하면 된다네. 조치해 뒀으니 알고 있게."라고 피드백을 줬다는 이야기다.

글을 읽는데 대기업 총수가 비서도 안 거치고 말단 사원한테 직접 전화를 걸었다는 게 꽤 감동적이기도 하고, "와, 진짜 멋있는 리더다" 싶었다.

보통 이런 글에는 ‘LG 구본무 회장’이나 ‘삼성 이건희 회장’, 또는 ‘웅진 윤석금 회장’ 같은 이름이 붙어 있길래, 내 블로그에 제대로 한 번 소개해 보고 싶어서 팩트가 맞는지 구글링을 좀 해봤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나왔다.

아무리 기업사나 전직 홍보맨들의 회고록, 당시 기사들을 뒤져봐도 대기업 회장님이 말단 직원한테 직접 전화를 걸었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었다.

대신 관가랑 언론을 통해 확실하게 검증된 '진짜 원조 팩트'가 따로 튀어나왔다.


이 일화의 진짜 주인공은 대기업 총수가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재임 초기나 후보 시절에 지방 현장 방문하는 걸 좋아했는데, 고위 간부들의 브리핑 대신 7~9급 공무원이나 현장 실무자들의 목소리 듣는 걸 즐겼다고 한다.

하루는 현장 간담회에서 한 말단 직원이 제도적인 모순 때문에 일하기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으니까,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수첩을 꺼내서 그 직원의 이름과 건의 내용을 꼼꼼하게 적었다.

당연히 주변 간부들은 대통령이 그냥 '듣는 척' 퍼포먼스를 하는 줄 알았을 거다.


진짜 소름 돋는 건 며칠 뒤였다.

청와대 비서관을 거친 것도 아니고, 그 말단 직원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직통 전화로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버린 거다.

"나 노무현인데, 지난번에 말한 그 문제 관련 부처에 확인해 보니까 법 개정이 필요해서 당장은 힘들고, 대신 시행령을 고쳐서 이렇게 해결해 주기로 했습니다.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조치 결과를 설명하고 고맙다고 하니, 당시 그 관공서가 아주 발칵 뒤집어졌다고 한다.

전무후무한 실화다 보니 이게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 입을 거치면서 ‘대기업 회장님 미담 포맷’으로 둔갑해 인터넷에 퍼진 모양이다.

문득 예전에 웅진 윤석금 회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소한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은 절대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했던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대기업 회장이든 대통령이든, 결국 본질은 같은 것 같다.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하는 것, 그리고 사소한 약속이라도 잊지 않고 지켜내는 신용의 가치 말이다.

내 수첩에는 어떤 사소한 메모들이 적혀 있는지,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소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지 한 번쯤 돌아보게 되는 밤이다.


동시에, 현재 내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해서도 문득 묘한 생각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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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강남에서 IT 사업가로 치열하게 일하며 수많은 직원을 두기도 했고, 지금은 일산 킨텍스를 거쳐 파주 운정이라는 곳으로 내려와 혼자 일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이후부터, 요즘 들어 부쩍 '약속'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에 대해 진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에게 약속은 조금 다른 의미인가?' 싶을 정도로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어기는 상황들을 연이어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11월, 우연한 권유로 일산에 내려와 미팅을 했다가 도시의 매력에 반해 곧바로 이사를 결심했었다.

킨텍스 주변에서 4년 가까이 살다가 최근에는 아내의 직장 때문에 파주 운정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곳으로 온 직후에는 혼자 일에만 파묻혀 지내다 보니 일상이 조금 무료해졌고, 오랜만에 사람 냄새가 그리워졌다.

강남에 있을 때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저녁 약속과 술자리가 의무처럼 매일 이어지곤 했는데, 이사를 오고 나니 그런 소모적인 만남들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어 한동안은 참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러다 문득 지역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모이는 당근마켓 기반의 친목 모임을 하나 발견하게 됐다.

한 달에 한 번, 작은 가게를 하시는 분부터 건설, 철거, 보안, 보험, 정비소 등 다양한 업종의 사장님들 20~30명이 모여 서로 돕고 교류하는 참 취지가 좋은 모임이었다.

바쁜 일정 때문에 한동안 뜸했다가 지난해 늦가을 무렵부터 다시 참석하기 시작했는데, 회원 사장님들께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 기꺼이 재능기부를 자처했다.

젊은 시절 강남에서 대기업과 관공서를 상대로 고액을 받으며 진행했던 마케팅 강의의 핵심을 압축해 미팅 전 미니 강의를 해드렸고, 모바일 명함으로 쓸 수 있는 미니 홈페이지도 무료로 제작해 드렸다.

내 노하우와 기술을 진심으로 공유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홈페이지 제작이나 리뉴얼이 필요하다는 사장님들의 요청이 들어왔다. 직원들 마케팅 교육도 소소하게 부탁하신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차를 몰고 직접 사업장들을 방문했다.

서너 명의 직원분들을 모아놓고 최신 트렌드에 맞춘 맞춤형 SNS 마케팅 특강을 20~30분간 열정적으로 진행해 드렸다.

미팅과 교육이 끝나고 저녁 시간이 되자, 한 사장님께서 고맙다며 근처 식당에서 고기에 소주 한잔을 대접해 주셨다.

평소 술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대화가 잘 통해 서너 병쯤 비웠을까, 술자리가 끝날 무렵 마침 퇴근한 아내가 택시를 타고 식당 앞으로 마중을 왔다. 사장님께 아내를 인사시키고 다음 날 다시 연락을 나누기로 기분 좋게 헤어졌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다지 기분 좋게 흘러가지 않았다.


다음 날 전화를 걸었더니, 홈페이지 계약 건은 내부 검토에 보통 한 달 정도 걸리니 기다려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장님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정성껏 미팅과 특강까지 진행했던 건이라 조금 의아했지만 묵묵히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길래 마침 다음 달 정기 모임을 앞두고 다시 연락을 취해봤다.

"대형 거래처 주문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다, 나중에 다시 연락 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는 짤막한 대답이 전부였다.

그리고 며칠 뒤 모임 현장에서 마주친 그 사장님은 술자리 도중 식당 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가더니, 다른 회원들과 섞여 짙어가는 밤하늘 아래서 대화를 나눌 뿐 내게 약속했던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이런 식의 허무한 기다림이 첫 번째 사장님만의 일이 아니었다. 내게 먼저 연락을 주겠다던 두 번째 사장님 역시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리고 지난주, 모임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여사장님과 이번 주 목요일 오후 4시에 김포 사무실에서 미팅을 하기로 분명히 구두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 대화를 나눌 수 있겠거니 생각하던 찰나, 어제 오후에 툭 하고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대표님, 제가 목요일에 일정이 있어서 지방을 가야 되다 보니 시간이 안 되겠어요. 날짜 다시 잡아요.'

이쯤 되니 서운함을 넘어 진지하게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혹시 나한테 문제가 있었나? 내가 미팅 자리에서 말실수라도 한 걸까?' 한두 명도 아니고 연속으로 약속이 어긋나다 보니, 정말로 원인이 나에게 있는 건지 심각한 의구심마저 든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말단 직원의 사소한 건의 사항까지 수첩에 적고 직접 전화를 걸어 약속을 지켰던 옛 리더들의 일화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밤이다.

비즈니스를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신용'과 '경청'의 무게가, 요즘 왜 이리 가볍게 흩어지는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 걸까. 정말 내가 문제인 걸까, 아니면 사소한 약속쯤은 쉽게 잊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가벼움이 문제인 걸까......

202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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