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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세 세종은 소갈·안질 시달려…82세 영조는 음식·질병 꾸준히 관리
기름진 음식·운동부족이 단명에 영향…"꾸준한 건강식단 실천 중요"

[AI가 만든 이미지]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추석이면 송편과 갈비찜, 전, 잡채 등 평소보다 풍성한 음식이 상에 오른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잘 먹는 것' 자체가 건강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음식이 넘쳐나는 현대에는 오히려 과식과 운동 부족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누구보다 좋은 음식을 먹고 당대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았던 왕들은 얼마나 건강하게 오래 살았을까.
조선 왕들의 질병과 사망 원인을 분석한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결과는 예상과 다르다.
1991년 한국인구학회지에 발표된 '조선조 역대 왕의 수명과 그 사인'을 비롯한 관련 연구에서는 역대 왕들의 평균 사망 연령을 대체로 46∼47세로 분석했다. 최근 국가유산진흥원이 기존 연구와 사료를 토대로 정리한 자료에서도 조선 왕 27명의 평균 사망 연령은 46.0세였다.
82세까지 산 영조가 가장 장수했고 태조(73세), 광해군·고종(각 66세), 정종(62세), 숙종(59세) 등이 비교적 오래 살았다. 반면 예종은 19세, 헌종은 22세, 인종은 30세에 생을 마쳤다.
물론 왕들의 짧은 수명을 음식이나 생활 습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정치적 죽음과 감염병, 당시에는 치료하기 어려웠던 질환 등 여러 요인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 당대 최고 의료 누렸지만…세종도 소갈·안질에 시달려
왕의 건강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조선은 내의원을 중심으로 왕의 건강을 관리했고 몸에 이상이 생기면 당대 최고의 의원들이 진료와 처방에 참여했다.
그런데도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왕들이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종이다.
육식을 좋아하고 체구가 컸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종은 5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소갈'(消渴)을 비롯해 눈병과 허리·등·다리 통증 등 여러 질환에 시달렸다.
세종은 재위 21년인 1439년에 소갈 증상이 생긴 지 10여년 됐으며 눈까지 나빠졌다는 취지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설명했다.
소갈은 심한 갈증과 잦은 소변 등이 특징인 전통 의학의 병증으로 현대 의학의 당뇨병과 비슷한 면이 있다. 다만 당시에는 혈당을 측정할 수 없었던 만큼 세종에게 현대적 의미의 당뇨병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눈병도 심각했다. 실록에는 세종의 눈이 어두워져 가까이 있는 사람을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런 기록을 토대로 세종에게 당뇨병과 이에 따른 합병증, 관절질환 등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 "기름진 음식과 운동 부족이 질병·수명단축 부른 듯"
한국외식산업학회지에 발표된 '음식이 조선왕들의 질병과 사망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논문(2020년)을 보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토대로 태조부터 성종까지 조선 전기 왕들의 질병과 사망을 분석한 결과, 음식 외에도 성격, 생활 습관이 골고루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이후 분석 대상을 연산군부터 현종까지 조선 중기 왕들로 넓힌 후속 연구에서도 이런 경향은 비슷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한의학에서도 지나치게 풍족한 식사를 경계했다는 사실이다.
연구팀은 조선 왕들이 풍족한 식생활을 누린 반면 기름진 음식과 운동 부족, 국정 운영에 따른 과도한 업무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이 건강에 불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특히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이 기름진 음식에 대한 식욕과 과식으로 이어지고, 이런 생활 습관이 각종 질병과 수명 단축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세종 때 편찬된 의서 '향약집성방'에는 소갈과 관련해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먹는 것이 몸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당시의 의학적 인식이 담겨 있다.
물론 이를 근거로 세종의 질병이나 조선 왕들의 짧은 수명이 과식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무리다. 당시에는 항생제와 현대적인 수술법이 없었고 천연두 같은 감염병이나 종기 하나도 생명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영조·숙종의 장수…"몸 안 좋을 땐 죽으로 관리"
조선 왕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예외는 영조다. 영조는 82세까지 살아 역대 조선 왕 가운데 가장 장수했다.
그의 장수 원인을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승정원일기를 분석한 국내 의사학 연구를 보면 나이가 들어서도 음식과 질병을 꾸준히 관리했던 흔적이 확인된다.
이 중에서도 영조는 죽과 관련된 기록만 2천33건이 확인된다. 갈근죽, 녹두죽, 연자죽, 율무죽, 타락죽(우유를 끓인 죽), 흑임자죽 등이 대표적이다.
주목되는 건 이들 죽이 배를 채우는 음식에 그치지 않고 왕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식사를 조절하는 '식치'(食治)의 수단으로도 활용됐다는 점이다.
59세로 비교적 장수한 숙종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음식 중 하나도 화려한 보양식이 아니라 죽이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이 즐겨 먹은 약죽과 관련한 기록만 89건에 달한다.
경희대 연구팀은 관련 논문에서 당시 숙종이 즐겨 먹은 녹두죽과 콩죽, 타락죽이 각각 한 끼 식사에 필요한 권장 열량의 약 31%를 공급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 현대인 12만명 최장 36년 추적…"건강한 식사군 사망위험 14∼20%↓"
수백 년 뒤 현대인을 장기간 추적한 연구에서도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와 장기적인 건강 사이의 연관성이 확인된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은 미국 내 11만9천315명(여 7만5천230명,남 4만4천85명)을 대상으로 평소 얼마나 건강하게 먹었는지가 사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을 2023년 '미국의사협회 내과학지'(JAMA Internal Medicine)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이들이 먹는 음식을 네 가지 기준으로 평가했다. 미국 식생활 지침에 맞춰 골고루 먹는 방식, 채소·과일·통곡물·견과류 등을 많이 먹는 지중해식 식단, 몸에 좋은 식물성 식품을 중심으로 먹는 방식, 통곡물·채소·과일 등 질 좋은 음식을 많이 먹고 붉은 고기와 당류 섭취는 줄이는 방식이다.
이 결과 각각의 건강한 식사 원칙을 가장 잘 지킨 사람들은 가장 덜 지킨 사람들보다 전체 사망 위험이 14∼20% 낮았다. 심혈관질환과 암, 호흡기질환에 의한 사망 위험에서도 건강한 식사를 한 사람들에게 대체로 유리한 연관성이 나타났다.
연구팀은 특정한 식사법 하나만을 정답으로 삼기보다 각자의 음식 문화와 취향에 맞는 건강한 식사 패턴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건강을 위해서는 얼마나 귀한 음식을 먹느냐보다 균형 있게 먹고, 몸 상태에 맞춰 식단을 조절하며, 꾸준히 움직이는 생활 습관이 더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bi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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