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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제공]
말을 잘한다는 건 무엇일까. 발음이 또렷하고 문장이 매끄러운 것만으로는 반쪽이다. 말의 성패는 결국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서 갈린다. 말하기도 하나의 그릇이어서, 채우는 데에도 정석과 요령이 있다.
"글도 아니고 말인데, 생각을 진솔하게 옮기면 그만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이왕 꺼내는 말이라면 조금 더 근사하고 알찬 편이 낫지 않겠는가. 말의 내용을 채우는 재료는 크게 셋이다. 경험, 지식, 그리고 생각(관찰과 아이디어). 이 세 가지를 고루 버무릴 때 비로소 말에 깊이가 생긴다.
주제 하나를 던지고 말해 보라 하면 대부분은 '경험의 나열'에 머문다. '여름'이라 하면 해수욕과 휴가철 도로 정체, 해외여행 이야기가 쏟아지고, '어머니'라 하면 자식 사랑의 사례와 아팠던 기억, 학창 시절의 추억이 주를 이룬다.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평범한 말하기일 뿐, 좋은 말하기라 부르기는 어렵다.
경험이라는 씨실에 지식과 사유라는 날실이 얹혀야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짜인다.
'지하철'을 예로 들어보자. 몇 호선 어느 역에서 타고 내리는지, 예전엔 어느 노선을 이용했는지, 꼴불견 승객을 본 일이며 물건을 두고 내린 기억을 죽 늘어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야기의 결이 달라진다. 땅속에 열차를 넣자는 발상은 19세기 런던의 법률가 찰스 피어슨에게서 나왔다. 그는 세계 최초의 지하철 개통으로 이어진 북부 메트로폴리탄 철도법을 입안한 개혁가였지만, 정작 정식 개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태어난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1863년 1월 10일 문을 열었고, 이는 세계 최초의 도시 지하 여객철도였다. 우리 지하철은 그보다 한참 뒤였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1974년 8월 15일 서울역~청량리 구간에서 개통된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로, 런던보다 무려 111년이 늦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하고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서거한 날이었기에, 개통식은 간소하게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 열차로 생계를 잇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기관사의 애환은 무엇일까?'
여기까지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습관이 몸에 배어야 하고, 그것이 말에 스며들어야 한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단골 카페가 어디고 맛과 값이 어떻고 분위기가 어떻고. 눈에 보이는 것, 최근 겪은 것만 늘 어놓으면 내용이 공허해진다. 손안의 잔 너머를 더듬어 보자. 에티오피아는 아라비카 커피의 원산지이자 커피의 고향이다. 염소들이 붉은 열매를 먹고 흥분해 뛰노는 모습을 본 목동 칼디가 그 열매를 맛본 것이 커피의 시작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며, 그 옛 지명 카파(Kaffa)에서 커피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향긋한 한 잔의 뒤편에는 산지의 고단한 노동이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이르는 1천200만 명 이상이 커피 관련 일에 종사하며, 커피는 나라의 제일 수출품이다. 공정무역을 떠올리고 아프리카 농장의 실상을 추체험(追體驗)해 볼 때, 커피에 대한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비로소 다채로워진다.
'자전거'라면 어떨까. 처음 배웠을 때의 기쁨, 넘어지고 또 넘어지던 기억, 요즘 자전거가 너무 비싸다는 푸념. 여기에 지식과 관찰을 얹어 보라. 현대 자전거의 효시로 불리는 것은 독일의 카를 폰 드라이스 남작이 1817년에 만든 '드라이지네'다. 흥미로운 건 그 탄생 배경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많은 군마가 죽고, 인도네시아 화산 폭발의 여파로 유럽에 흉작이 들어 말을 먹일 형편조차 못 되자, 말을 대신할 탈것이 절실했다. 재난이 발명을 낳은 셈이다. 게다가 자전거는 인간이 만든 온갖 탈것 가운데 가장 인간적이다.
근육의 힘으로 페달을 밟은 만큼만 나아가니까.
'아파트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려진 자전거들을 손봐 저소득층에 나눠 주면 어떨까?'
이런 주의력과 관찰력이 말에 실릴 때 이야기는 비로소 살아난다.
정리하면 이렇다. 좋은 말하기의 내용은 구체적인 것·특수한 것·개별적인 것과, 그에 맞서는 개념적인 것·보편적인 것·추상적인 것이 근사하게 맞물려야 한다. 여기에 시의성(時宜性)과 관찰력이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한 가지 함정도 짚어 두자. 말이 서툰 사람에게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 '주제의 끈을 놓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전거'를 주제로 시작해 놓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자전거를 배웠는데 그때 친구들이…"로 흐르다가 어느새 단짝 친구 이야기, 우정론, "친구란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는 예찬으로 빠져 버린다.
자전거는 온데간데없다. 왜 이런 함정에 빠질까. 역설적으로, 자신 있는 소재와 할말 많은 아이템에 과도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해법은 자명하다. 맛있는 음식이라고 급히 많이 먹으면 체하듯, 유리한 소재일수록 오히려 절제하며 압축해서 전하는 것이다.
짧지만 굵게, 그리고 어디까지나 주제를 지탱하며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대목을 중심으로 이어 가야 한다. 말의 그릇은 넓게 채우되, 흘러넘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전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현 가천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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