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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률 단국대 교수, 지배구조 결함과 규제 구멍으로 인한 복지시장 실패 지적
단기적으로 기금형 도입하고 중장기적으로 종신연금 확대해야

[제작 이태호] 사진합성, 일러스트
(서울=연합뉴스) 서한기 기자 = 한국의 퇴직연금 제도는 보험료율이 8.3%로 결코 낮지 않은 법정 강제 제도다. 제 역할을 수행할 경우 30년 근무 기준으로 은퇴 전 소득의 18%에서 20%를 메워줄 수 있는 거대한 재정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해 3월 이뤄진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2026년부터 국민연금의 평균 소득대체율은 43%로 조정됐다. 소득대체율은 평생 버는 돈 대비 연금으로 받는 액수의 비율을 뜻한다. 나라에서 주는 공적연금만으로 안정적인 노후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퇴직연금은 노후 소득을 튼튼하게 받쳐줄 핵심 축이다. 장기적으로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이 정상적으로 합산되면 40년 가입 시 은퇴 전 소득의 60%를 넘는 돈을 체계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을 둘러싼 소득보장 강화와 재정 안정화 사이의 소모적인 대립을 해소할 청사진이 마련된다. 그러나 현재의 퇴직연금은 지배구조의 결함과 느슨한 규제로 인해 가입률 53.3%, 연금 수령률 13%에 머물고 있다. 사실상 복지시장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어 가입자 중심의 '퇴직연금 2.0' 시대로의 구조적 전환이 시급하다.
◇ 금융기관 독점 지배구조와 규제 구멍이 부른 복지시장 실패
17일 국민연금연구원의 '연금포럼' 2026년 봄호에 실린 정창률 단국대 교수의 '노후소득보장 강화를 위한 퇴직연금 발전방안: 문제점과 단계적 개선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퇴직연금이 노후소득보장 제도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실패한 근본 원인은 계약형 지배구조에 있다. 도입 초기부터 금융시장 활성화를 목표로 설계돼 금융기관에 주도권을 부여한 탓이다. 회사와 노동자의 참여 없이 금융기관이 제시하는 금융상품 목록 안에서 전문성 없는 개인이나 기업 인사담당자가 투자 결정을 내리다 보니 자산의 대부분이 원금과 이자만 보장되는 안전한 상품에 안주하게 됐다. 그 결과 최근 5년 평균 수익률이 2.86%로 국민연금 성과의 절반 이하에 머무는 고질적 저수익 문제를 낳았다. 이런 낮은 수익률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들은 연간 2조원 수준의 수수료를 규제 없이 꼬박꼬박 챙겨가는 비효율적 운용을 지속하고 있다.
정 교수는 느슨한 규제 탓에 연금 자산이 노후까지 축적되지 못하고 이른 시기에 소진되는 구조적 구멍도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주거 구입 등을 이유로 한 중도인출 요건이 지나치게 완화돼 있고 이직할 때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로 이전된 적립금은 약간의 세제 손실만 감수하면 사유 불문하고 해지할 수 있다. 실제로 2024년 기준 6만7천명이 중도인출로 3조원을 꺼냈고 99만2천명이 해지를 통해 14조5천억원을 인출해 상당수가 사전에 소진됐다.
정 교수는 수명의 차이를 반영하는 종신연금 개념이 애초에 부재해 정해진 기간만 나눠 받는 방식이며 일시금 수령이 일반화된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2023년 기준 평균 수령액은 연금 계좌가 1억3천976만원이지만 일시금 계좌는 1천645만원에 불과한데 자산 규모가 적은 사람일수록 일시금을 선호해 노후 자산을 빠르게 소모하는 실정이다.
수급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규제와 행정조치도 방치돼 있다. 확정급여형(DB) 방식을 도입한 사업장의 절반이 적립 부족 상태인데도 과태료 부과가 거의 없고, 확정기여형(DC) 사업장의 약 10%에서는 사용자의 보험료 미납이 발생하고 있으나 지연이자 규정이 없어 가입자 손해로 귀속된다고 정 교수는 비판했다. 정 교수는 영세 사업장의 도입률은 낮아 전체 임금 체불의 40%가 비적립 퇴직금 체불과 연관돼 있다며 매년 수조원의 세제 혜택을 제공하면서도 복지시장 실패와 노후소득 보장 체계의 붕괴를 야기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 기금형 지배구조 도입과 일원화를 통한 단기적 개혁
정 교수는 제도 개선을 위해 단기 방안과 중장기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단기 과제의 핵심은 기금형 퇴직연금 지배구조의 도입이라고 밝혔다. 기존 금융기관 주도 계약형 구조에서 벗어나 기업이나 산별 단위로 수탁법인과 이사회를 설립하고 노사 참여하에 전문가의 의사결정으로 투자를 집행해 수익률 제고를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 교수는 이런 개혁이 근로자가 제도의 주인으로서 참여하도록 유도하며 중장기 제도 개선을 위한 기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현재 퇴직금과 퇴직연금으로 분절된 이원화 구조를 적립식 퇴직연금 제도로 일원화하는 조치가 시급하다고 정 교수는 지적했다. 퇴직금 제도는 사용자의 도산 시 체불 위험이 있으므로 일원화를 통해 중소기업 근로자의 수급권을 원천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 교수는 정기적인 보험료 납입에 따른 중소기업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재정지원을 하거나 임금채권보장제도를 개편해 사외 적립 전환을 유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원화가 이뤄지면 근로복지공단의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인 푸른씨앗이 활성화될 수 있으며 높은 수익률을 증명한 만큼 공공형 플랫폼으로서 노후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정 교수는 기대했다. 아울러 적립부족이나 보험료 미납에 대해 적극적인 행정조치를 실시하는 것도 단기 조치로 필요하다고 정 교수는 덧붙였다.
◇ 중장기 과제…자산 확보와 종신연금 확대
중장기적으로 정 교수는 연금 자산의 장기 축적을 유도하기 위해 중간정산과 해지 요건을 단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많은 근로자가 중간정산이나 해지를 지출 계획에 반영해 온 상황이므로 일시에 폐지할 수는 없기에 우선 해지 요건을 보수적으로 강화하고 중간정산으로 인출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는 방식의 개선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경험적으로 연금 자산 확보 규모가 커질수록 일시금 선호가 줄어들기 때문에 적립금을 묶어두는 장치는 필수적이라고 조언했다.
또한 기금형 지배구조가 정착되면 중장기적으로 일부 기금부터 수명 위험을 담보하는 종신연금 지급을 약속하는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정 교수는 강조했다. 현재 제도는 자산 총액을 확정해 제공할 뿐 수명의 차이를 반영하지 못하므로 실제 종신연금을 지급하는 구조로 전환돼야만 실질적인 다층 소득보장 제도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 교수는 1년 미만 근속 근로자 제외 규정을 폐지하고 기업의 부담을 고려해 가입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나아가 근로계약을 하지 않았으나 유사한 직무를 수행하는 노무 제공자 등에 대한 적용 문제도 중장기 과제로 함께 다뤄져야 한다고 제시했다.
sh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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