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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출판사는 책으로 말한다

입력 2026-05-21 07: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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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60년 '중용의 길'…교조·엄숙주의 벗어나 대중 눈높이에 충실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판사는 판결로, 기자는 기사로, 기업인은 실적으로 말한다." 우리가 살면서 흔히 듣는 말이다. 어떤 일이든 각자 직분에 충실한 결과물을 내놓는 게 최선이란 뜻이 담겼다. 출판계에서 단행본 하면 떠오르는 민음사는 이런 철학을 첫걸음부터 변함 없이 지켜왔다는 평을 듣는다. 최근 창립 60주년을 맞았지만, 기념식 같은 특별한 행사 없이 이순(耳順)의 생일을 여느 때처럼 평범히 보냈다. 민음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출판사는 책으로 말해야 한다."




도서관에 꽂힌 책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이처럼 민음사는 본분에 충실함을 미덕으로 삼는 '조용한 강자'로 인식된다. 출판계가 이념과 정파성 등에 흔들릴 때도 민음사는 출판사 본연의 역할에만 충실하며 중용을 추구했다. 지식, 교양, 예술의 전파자이자 매개체로서 출판사가 수행해야 할 기능을 치우침 없이 수행했다. 이는 고(故) 박맹호 창립자(1933∼2017)의 오랜 신념이었다. 출판사 이름을 '민음(民音)'으로 정한 것에도 '백성의 소리를 그대로 담아낸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됐다. 대중을 가르치거나 선도하겠다는 오만한 태도가 아니라, 시류에 휩쓸림을 경계하며 독자들과 진실하게 교감하겠다는 자세였다.


1966년 서울 종로구 청진동 옥탑방에서 소박하게 출발한 민음사는 이런 진정성을 인정받으며 오늘날 9개 브랜드를 거느린 출판그룹으로 성장했다. 문학뿐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 과학, 아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고루 성과를 냈다. 무엇보다 민음사는 창작 단행본 시장을 개척하고 선도해 우리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고 우리 문학 저변을 넓히며 창비(창작과비평사)와 문지(문학과지성사)라는 문학출판 양대 산맥 사이에서 독보적 위치를 확보했다. 출판 본질에 충실하겠다는 철학과 참신한 기획력 덕분이었다. 우리 문단 특유의 교조주의와 엄숙주의에 발목 잡히지 않고 창립 철학대로 대중의 눈높이만 바라본 원칙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기획물이 '총서 시리즈'이다. 시(詩) 대중화를 촉발한 '오늘의 시인 총서'를 필두로 '오늘의 작가 총서' 등 문학 총서 시리즈를 꾸준히 출간해 20세기 후반 문단을 이끈 수많은 작가를 발굴하고 성장시켰다. 소설 분야의 '오늘의 작가상'과 시 부문의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해 이를 총서 프로젝트와 연결한 것도 창작 단행본 시리즈를 사랑받게 한 기획의 성과다. 이문열, 한수산 등 서사 중심 이야기꾼과 황지우, 이성복, 강석경, 정희성 등 시단의 미학 혁명을 이끈 시인들이 이런 요람을 통해 독자들에 이름을 알렸다. 아울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국내 문학 번역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리는 동시에 국내 출판계 판도를 바꾼 기념비적 프로젝트로 회자한다.




박맹호 민음사 창업자

[민음사 제공=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창업자 박맹호와 소설가 이문열의 우정도 민음사의 성장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얘깃거리다. 출판계와 문단의 두 거장은 오랜 사업 파트너였을 뿐 아니라 평생 서로를 성장시키고 지탱해온 인생의 동반자였다. 거듭된 신춘문예 낙방에 좌절하던 이문열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세상에 알린 이가 박맹호다. 그는 '오늘의 작가상'에 응모한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읽고는 이문열에게 장편으로 늘려 출간하자 제안했고, 이를 조건으로 당선작으로 뽑았다. 종교적 사유를 서사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기념비적 장편 '사람의 아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무명의 이문열은 이 걸작 하나로 문단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이문열은 이후 잇달아 수작과 문제작을 써냈고, 수많은 대형 출판사가 거액의 선인세를 제시하며 그를 유혹했다. 그러나 그는 박맹호와 신의보다 중요한 건 없다며 쇄도하는 러브콜을 일거에 거절했다. 박맹호는 이문열이 한때 정치적 언행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이념이 문학의 가치를 재단할 수 없다는 평소 신념대로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두 사람의 오랜 신뢰는 국내 출판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도 낳았다. 2천만 부를 훌쩍 넘게 팔리며 범접할 수 없는 판매고를 쓰고 있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출판계 신화로 남았다.


앞으로도 민음사가 책에 대한 '장인정신'을 잃지 않길 응원한다. 책으로 모든 걸 말하겠다는 초심도 끝까지 이어지길 바란다. 경영을 이어받은 2세들 역시 선친의 유지를 잘 받들고 있다고 한다. 이리저리 부는 바람에 흔들림 없이 본질에 충실해 온 DNA를 변함 없이 유지한다면 언젠간 우리나라도 '단행본 세계 챔피언' 펭귄랜덤하우스 못지않은 출판 명가를 보유하게 될지도 모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민음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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