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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영화 친구(2001년 개봉)에는 교사 역의 김광규가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교단 앞으로 불러세워 다그치듯 묻는 장면이 나온다. "니 아부지 뭐 하시노?" "건달입니다."

2001년 개봉작 '친구'에서 교사가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
학교 1진 유오성의 대답에 교사는 "허어, 이 XX가"라며 손목시계를 풀어놓고 마구 뺨을 때려 바닥에 쓰러트린다. "좋겠다, 이 XX야"라는 욕설과 발길질이 이어지자 유오성은 참다못해 "누가 좋다 했습니까"라며 교사에게 맞서고, 그 길로 학교를 뛰쳐나가 조직폭력배의 세계로 발을 들인다.
지금 청년 세대 눈에는 과장된 장면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 교련과 체벌 문화 속에서 학교를 다닌 세대에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당시 교실은 배움의 공간인 동시에 "까라면 까고, 때리면 맞으라"는 상명하복의 규율을 체득하는 내무반에 가까웠다.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수모를 당하거나 진학 상담을 위해 교사에게 촌지를 건네는 일이 일상인 시대였다.
전후 한국 사회에서 교육자는 특별한 존재였다. 대학 나온 사람이 10명 중 1명도 채 안 되던 시절이어서 고등고시와 육사 출신에 버금가는 엘리트 대우를 받았다. 교육청 장학사(6급 이상 공무원)가 온다는 날이면 학교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학생들은 걸레를 손에 쥔 채 복도와 화장실 바닥을 광이 나도록 닦아야 했다.
운동장에 돌멩이 하나, 칠판 위 먼지 한 줌에 쏟아지는 장학사의 질책은 교사의 분노로, 학생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아비규환을 겪은 학부모 세대는 이를 질서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훈육쯤으로 여기며 묵인했다. 학생들은 과도하게 폭력을 일삼는 교사들을 '게슈타포', '마녀'라고 부르며 증오했다.

(서울=연합뉴스) 10일 교육감 선거 예비후보들이 학생인권보장과 조례제정 협약에 서명한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상곤 경기 교육감 예비후보,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 준비모임 장은숙 대표. 이청연 인천 교육감 예비후보, 곽노현 서울 교육감 예비후보. 2010.5.10
cunningpark@yna.co.kr
살벌했던 교단 풍경을 뒤집어놓은 것은 비약적인 경제 성장과 민주화의 물결이었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인권 의식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면서 교단의 상명하복 체계는 학부모의 날 선 민원과 학생들의 권리 주장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체벌 금지를 규정한 학생인권조례 도입과 함께 손안의 휴대전화가 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감시하는 시대가 되자 교사의 절대 권위는 급속히 무너졌다. 그 빈자리를 교권 침해와 교실 붕괴가 채웠고, 한때 존경의 상징이었던 스승의날 카네이션도 상호 불신과 김영란법의 칼날 앞에 자취를 감췄다.
오늘날 교실 내 갈등의 이면에는 권위주의 시대가 남긴 집단적 트라우마도 자리 잡고 있다. 과거 교사의 폭력을 직접 겪고 목격하며 자란 세대가 학부모와 조부모가 되어, 현재의 교사들까지 잠재적 가해자처럼 바라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 교실의 상처는 초저출산 시대의 특수성과 맞물리며 오히려 깊어졌다. 자녀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시대에 부모의 방어 기제는 극대화돼 내 아이가 학교에서 겪는 사소한 불편함조차 부모는 아이의 삶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교사 폭력의 트라우마와 과보호 본능이 결합해 교사를 향한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는 셈이다.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24일 광주 한 초등학교 앞에서 교사들이 이 학교 A교사의 교권 회복 촉구 집회를 하고 있다. A 교사는 학생 간 싸움을 말리는 과정에서 책상을 밀쳤다가 아동학대 혐의로 학부모에게 고소당했다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2023.10.24
iny@yna.co.kr
이제는 이 악순환을 멈춰야 한다. 과거의 상처는 분명 치유돼야 하지만, 그것이 오늘의 교사를 이유 없이 적대시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교사들은 학생을 군기 잡던 '호랑이 선생'이 아니라, 악성 민원과 감정 소모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감정 노동의 최전선에 놓인 이들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국가 역시 다시 교사를 교육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노력에 적극 나서야 한다. 학생 인권만큼 교사의 인권과 교권도 균형 있게 보호돼야 학교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니 아부지 뭐 하시노'의 망령이 쳐놓은 철 지난 학생 인권의 그물을 걷어낼 때가 됐다.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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