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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유해송환 '글로리 작전' 참여 동갑내기의 '70년 우정'
한미 의장대대장으로 인연…"영웅이 돌아오던 순간 희생에 존경"
옛서울 생생한 사진 기록도…"한국 번영에 기뻐, 후손들 우정 이어가길"

(서울=연합뉴스) 조현영 기자 = 20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1954년 '글로리 작전' 당시 한미 의장대를 이끌었던 프랜시스 스웨트(95) 씨와 김주찬(95) 씨가 과거 함께 근무하며 찍었던 사진을 들고 있다. 2026.10.25 hyun0@yna.co.kr
(서울=연합뉴스) 조현영 기자 = 6·25 전쟁 상흔이 짙었던 1954년 9월 판문점.
북측에서 넘어온 전사자 유해가 '글로리 작전'(Operation Glory)이라고 적힌 문을 통과할 때마다 양쪽에 도열한 한미 의장대가 서서 엄숙한 경례를 했다.
글로리 작전은 1954년 9∼10월 판문점에서 이뤄진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 작전을 말한다. 한미 의장대는 6주 동안 약 4천구의 유해를 거둔 이 작전을 함께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연합군과 북한 측이 전사자 유해를 상호 교환하는 계획에 합의하면서 이뤄진 작전이었다.
판문점에는 두 동갑내기 20대 의장대대장이 있었다. 미국 측 프랜시스 스웨트 중위와 우리 측 김주찬 중위였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72년째 이어졌다.
70여년만에 한국을 찾은 스웨트(95)씨는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며 "한국이 번영한 모습을 보니 기쁘다.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며 활짝 웃었다. 김주찬(95)씨도 함께 자리했다.
두 사람의 재회는 35년 만이다. 스웨트씨는 생전 김씨를 한 번 더 만나기 위해 온 가족을 데리고 한국 땅을 밟았다고 했다.

[프랜시스 스웨트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스웨트 씨가 처음 한국에 온 건 1954년, 그가 23세 되던 해였다.
캔자스 주립대에서 농업을 공부하던 시절 신문에서만 한국전쟁 소식을 접했던 그는 졸업 후 학군사관후보생(ROTC)으로 임관해 한국 근무를 지원했고 그해 2월 배치됐다. 그때부터 16개월간의 한국 복무가 시작됐다.
글로리 작전에 투입된 스웨트씨는 판문점에 첫 유해가 도착하던 날을 떠올리며 "소대장으로서 책임감이 느껴져서 매우 긴장했다"고 말했다.
전사자에 엄숙한 예우를 갖추려면 한 치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유해는 흰 시신 운반용 가방에 싸여 6∼10구씩 호송 트럭에 실린 채로 '글로리 작전' 문을 통과했다. 상당수는 흩어진 뼛조각을 모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그때는 국군에 의장대가 없어 전방 각 사단에서 건강하고 신장이 165㎝ 이상인 사람들을 두 명씩 선출해서 30명 정도가 판문점에 파견됐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신원이 확인되는 유해는 가족에게 보냈고 확인 안 된 유해는 일정 기간 보관하다가 유엔군은 유엔 묘지에, 국군은 국립묘지에 안치했다"고 설명했다.

[프랜시스 스웨트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렇게 구성된 한미 의장대는 유해가 지나가는 길 양쪽에 줄지어 서서 경례하고 '받들어총'을 하며 예를 표했다.
스웨트씨는 "한 구 한 구 지나갈 때마다 희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며 "영웅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6주 동안 약 4천구의 유해를 받았다.
유해 중 1천800구는 미군, 나머지는 국군과 타국 군인으로 추정됐다. 송환된 유해는 신원 확인을 위해 하와이로 옮겨졌다.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거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전사자들을 떠올리던 스웨트씨는 "많은 전쟁이 그런 것 같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어떤 가족들에게는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로 남아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프랜시스 스웨트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스웨트 씨는 70년 전 한국을 떠올리며 "언제 다시 전쟁이 터질지 몰라 불안했다"면서도 "한국인들은 강인했고 회복력이 매우 빨랐다"고 돌아봤다.
글로리 작전 이후 강원도 양구의 예비 부대에서 일할 때는 정전협정이 지켜질지 확신할 수 없어 24시간 내내 방어 진지를 지켰다고 한다.
북쪽에서 탱크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린 밤은 90대 노병에게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다. 부대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지만, 스웨트씨는 그날을 떠올리며 "한국에서 가장 긴장했던 때"로 기억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강인한 한국인들에 깊이 감명받았다는 그는 당시 갖고 있던 사진기로 한국, 특히 서울·경기 등을 기록했다.
당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지금은 옛 기억 속 서울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다"고 말했다. 사진에는 중절모를 쓴 노인과 낡은 옷을 입은 채 무거운 인력거를 끄는 남성 등 그 시절 한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프랜시스 스웨트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글로리 작전 종료 후 김씨를 다시 만난 건 이듬해인 1955년 2월이었다.
김씨가 양구 미군 부대로 이동한 스웨트 씨를 찾아오며 인연의 끈이 이어졌다. 언어가 통하진 않았지만 몸짓, 손짓만으로도 친구가 되기엔 충분했다.
스웨트씨는 귀국을 앞둔 1955년 6월에는 미군 헌병을 통해 김씨의 근무지를 확인하고 김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김씨가 참여했던 국기 하강 행사가 끝나고 만난 두 청년은 그날 저녁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스웨트씨가 한국을 떠난 뒤에도 두 청년의 우정은 이후 70년간 이어졌다. 크리스마스에는 서로에게 선물과 카드를 보냈다.
1991년에는 김씨 부부가 미국에 가 스웨트 씨 집에 머무르기도 했다. 그 애틋함을 보여주듯 두 사람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쳤다.

[김주찬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스웨트 씨는 계속되는 남북 긴장에 대해 "전쟁이 진행되고 있지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사이에 선이 있는 상태"라며 "사람들이 긴장 속에 살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그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씨가 사는 한국이 항상 안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웨트 씨는 한국에서 김씨의 집을 방문하고 전쟁기념관과 비무장지대(DMZ)도 둘러보며 엿새간의 시간을 보내고 24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스웨트씨는 한국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있다. 우리 모두가 한 가족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김씨는 자신의 무공수훈훈장을 스웨트 씨에게 달아주고는 "건강하게 여생을 보내고 후손들이 우리의 우정을 이어가길 바란다"며 미소 지었다.
hyun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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