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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가들, 붓에서 선율로…"스스로 역사 선택한 영웅"

입력 2026-08-15 0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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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박희정, 윤석남 화백 그림 모티프로 오라토리오 '무명의 초상화전' 작곡


오는 22일 심포니송 '위대한 대한민국'서 초연…"슬픔보단 용기 표현"




윤석남, '남자현 초상', 210x94cm

[학고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단순히 일제에 고통받은 희생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역사를 선택하고 행동했던 강인한 주체이자 영웅이었고, 이러한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작곡가 박희정)


모진 세월을 견뎌내며 패인 주름과 쏘아보는 듯한 강인한 눈빛에서 보이는 기개와 충정.


저항의 의지를 드러내는 굳게 쥔 주먹과 독립운동 참여 혈서를 쓰고자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낸 다른 편 손.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 화백이 그린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 클래식 음악으로 되살아난다.


지휘자 함신익이 이끄는 악단 심포니 송은 오는 22일 서대문문화체육관에서 개최하는 광복 81주년 콘서트 '위대한 대한민국'에서 윤석남의 그림을 모티프로 한 오라토리오(서사가 있는 대규모 종교 악곡)를 초연한다.


전봉준 장군을 기리는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등 한국 음악을 클래식으로 만들어온 작곡가 박희정의 신작 '무명(無名)의 초상화전'이다.


작사·작곡을 맡은 박희정은 광복절인 15일 연합뉴스 서면 인터뷰에서 "윤석남 화백의 그림이 주는 울림을 음악이라는 또 다른 언어로 이어가고자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작곡가 박희정

[심포니송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작품은 함신익이 최근 박희정에게 '광복절 콘서트를 위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하며 기획됐다.


박희정은 올해 봄에 방문한 한국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알게 됐고, 이들에 대해 조사하던 중 윤석남이 지난 2021년 열었던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에 대해 알게 됐다.


강주룡, 권기옥 등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대형 초상 연작을 선보였던 전시다. 여기에 오광심 등 8인의 초상이 추가로 온라인으로 전시됐다.


"온라인으로 작품을 접했지만 정말 강렬한 초상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 뚜렷한 감정선과 확고한 의지, 치열함, 모진 세월이 동시에 응축된 듯했죠."


박희정은 이들의 이야기를 독창과 합창,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현대적 오라토리오로 되살려냈다.


작품은 고즈넉하면서도 으스스한 밤 포탄의 울림을 암시하는 오케스트라의 장중한 연주로 시작해 2악장부터 차례로 독립운동가 오광심, 이병희, 윤희순, 박차정, 남자현, 김명시, 동풍신, 조신성, 권기옥 등의 인생을 조명한다.


"본격적인 음악은 광복군 기관지에 '한국 여성동지들에게 일언(一言)을 드림'을 기고한 오광심 열사를 다룬 2악장에서 출발해요.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나아가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여성의 권리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오광심 열사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어지는 3악장의 제목은 '서대문형무소'로, 양손이 묶인 채 좁은 감옥에 갇힌 이병희 열사의 초상을 보고 지은 부분이다.


2악장에서 엿보이는 희망은 사라지고, 형무소에서 스러진 독립운동가들의 기리는 슬픈 진혼의 행진곡이 나온다. 플루트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애가(哀歌)를 연주한다.


윤석남 화백의 설치작품 '붉은 방'에서 영감을 얻은 4악장을 지나면 5악장 '전장의 여인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 윤희순과 조선의용대 단장 박차정, 영화 '암살' 속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로 만주에서 활동한 남자현, '백마 탄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명시의 초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웅장한 호른과 목관악기의 소리가 전쟁의 나팔을 연상시킨다.


6악장은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15세 소녀 동풍신의 모습을 담았다. 동풍신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17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박희정은 "이 악장에서 그가 독립운동을 하며 마음에 품었을 아름다운 꿈을 상상했다"며 "종달새가 우짖는 푸른 동산, 산들바람이 부는 평화로운 세상, 사랑하는 가족과 웃을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다. 소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희망을 그렸다"고 전했다.


대미를 장식하는 7악장 '영웅의 노래'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조신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마리아,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비밀결사대 송죽회 회원이었던 권기옥을 테마로 한 힘찬 합창으로 구성됐다.




윤석남 작가가 그린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장장 7악장에 걸친 음악을 만들며 이들의 삶의 궤적을 되짚어본 박희정은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 시절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일제에 당한 끔찍한 성고문과 폭력은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장애를 안겨줬습니다. 그럼에도 광복 후 이들에게 충분한 사회적 인정이나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죠."


이병희와 김마리아, 조신성 등 많은 독립운동가는 광복 후 살아남았음에도 가난과 병마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러나 박희정이 주목한 것은 이러한 슬픔과 고통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들의 위대한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자 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놀라울 정도로 강했고, 담대했고,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어요. 용기와 치열함은 압도적이었죠."




윤석남의 권기옥 초상

[대구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작품은 합창이 주가 되는 오라토리오의 형식을 띤 만큼, 악장의 주제에 따른 가사가 있는 곡이다.


그중에서도 오광심 열사의 '한국 여성동지들에게 일언(一言)을 드림'의 내용을 따온 소프라노의 레치타티보(오페라나 종교극 따위에서 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형식)가 눈에 띈다.


소프라노는 '저들 마음대로 숨죽여 가네. 아름답던 이름, 소중한 기억을 버리네…절대 속지 마라, 그 달콤한 말에. 네 영혼 넘기지 말고…'라며 독립운동의 정신을 강조한다.


이에 대비되는 가사도 있다. 일제의 회유의 말을 현대 언어로 풀어낸 4악장 '총독부 서한'이다. 여기에는 '진부한 독립 이야기, 대한제국!…친일파든 매국노든, 네가 쟤네보다 나으니 다행이다. 네 부귀, 너의 명예'라는 구절이 랩 가사처럼 삽입됐다.


박희정은 "오늘날의 청중에게도 일제강점기의 선동과 폭력이 다가올 수 있도록 했다"며 "애국적인 소재를 음악으로 형상화하면 자칫 진부해질 수도 있는데, 이를 피하고자 힙합 요소와 할리우드 영화음악 느낌의 관현악 파트를 넣었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작품을 만든 의도가 "지금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라고 강조했다.


"예술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니까요. 다른 시대를 산 이들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예술의 특별한 힘을 빌려 이분들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전하고 싶습니다."


fa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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