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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나이키 수출 2억불 달성 홍보 광고]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1974년 부산 범천동의 삼화고무 공장에 36세 백인 청년이 찾아왔다. 10년 전 일본 러닝화 '타이거(훗날 아식스)' 수입상으로 출발해 '나이키(NIKE)'라는 자체 브랜드를 키워가던 창업자 필 나이트였다. 그는 송승호 당시 삼화고무 수출부장을 만나 운동화 3천켤레를 첫 주문으로 넣고 5년 독점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계약을 맺었다.
나이키는 우수한 노동력과 엄격한 품질관리를 갖춘 삼화 덕분에 미국 시장을 석권하며 세계로 뻗어나갔다. 첫 주문 3천켤레는 곧 수만 켤레로 불어났다. 부산은 한때 나이키 생산물량의 70%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신발공장이 됐다.
부산을 딛고 글로벌 기업으로 큰 나이키는 1981년 한국에 공식 매장을 열어 시장 선점에 들어갔다. 전두환 정권의 3S(스포츠·섹스·스크린) 정책과 이듬해 프로야구 출범이 나이키의 덩치를 더욱 키웠다. 2차 대전 직후 독일의 아디 다슬러가 세운 아디다스(ADIDAS)와 일본의 아식스(ASICS)도 뒤이어 한국 시장에 뛰어들었다.

[시인 동길산씨 제공]
1983년 단행된 교복 자율화는 운동화 시장에도 불을 질렀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에 육박하던 3만~5만원짜리 외제 운동화는 교실 안 빈부를 가르는 표식이 됐다. 교정과 골목길에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노린 '삥뜯기'와 도난사고가 잇따르자 외제 운동화를 신고 오지 못하도록 하는 학교가 잇따랐다.
동대문 평화시장 등 전국 주요 도시의 재래시장에는 비싼 외산 운동화를 살 형편이 안 되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매대에는 '나이스(NICE)'를 필두로 '아디도스(ADIDOS)', 'ASIX' 같은 수천원짜리 조잡한 짝퉁이 쏟아졌다.
교복자율화가 만든 이른바 '짜가'의 전성시대였다.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지금의 40·50대에게 나이키는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가난에 대한 원망과 세상의 불공평에 대한 불만이 담긴 쓰라린 기억이기도 하다.

11일 서귀포 동부구장에서 계속된 국가대표팀 훈련에서 홍명보, 황선홍등 노장들이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받고 있다./양현택/체육/월드/ 2002.5.12 (서귀포=연합뉴스)
부산의 기술력이 낳은 나이키 제국이 반세기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실적 부진과 주가 급락 끝에 미국 대표 우량주 지수인 S&P 100 퇴출이 결정됐다. 과거의 영광을 우려먹은 '레트로 팔이'와 덩크·에어포스1 같은 기존 히트작의 색깔만 바꿔 내놓는 '컬러 장사'에 치중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이키가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는 사이 소비자들은 더 편하고 기능적인 신발과 새로운 디자인을 찾아 떠났다. 두툼한 쿠션의 호카(HOKA)와 밑창에 구멍이 숭숭 난 듯한 독특한 디자인의 온(On)이 대표적이다. 부동의 1등 브랜드도 혁신을 주저하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시장의 법칙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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