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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블랙 리스트(Blacklist)는 단죄하거나 보복하려고 골라놓은 인물들의 명단을 뜻한다. 영국 왕 찰스 2세가 부왕의 처형에 관여한 자들을 찾아 복수하려고 작성한 리스트였다. 현대에 와선 정부, 사법기관, 기업 등에서 반사회·반조직적 인물을 감시하거나 제재 또는 제거할 목적으로 작성해 관리하는 명단이란 의미로 통한다. 살생부(殺生簿)도 비슷한 용어인데, 여기엔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구분해 모두 적는다는 차이가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블랙 리스트나 살생부는 힘이 강하거나 권위를 지닌 쪽에서 만든다. 과거엔 정부나 공안기관, 대기업 등에서 반체제 인사, 운동권 핵심, 노동조합 간부 등을 블랙 리스트에 올린다는 표현이 흔했다. 시국이 어수선한 시절이나 기업 구조조정 시즌 등에는 '블랙 리스트 파동' 같은 제목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블랙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봤다고 주장한 쪽은 스스로 약자임을 부각했는데, 이를 기본권을 억압하는 중범죄나 인권 탄압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과거 피해자임을 호소했던 노조가 블랙 리스트를 작성해 반대파나 비협조자들을 색출·관리하고 협박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삼성전자 초기업노조) 위원장과 핵심 간부가 임직원 개인정보 유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사내 시스템을 담당하는 핵심 간부는 무려 10만명 넘는 임직원 명단 파일을 무단 수집해 지도부에 전달했으며, 위원장이 이를 활용해 노조 미가입자 명단을 만들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법원에 따르면 심지어 위원장은 "회사를 위해 근무하는 자가 있다면 명단을 관리해서"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사측을 옹호하는 자"를 신고할 제보센터를 운영하고 신고 포상금도 주겠다고 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다. 사법기관 기록대로면 악의적으로 블랙 리스트를 작성해 활용하려 한 전형적 사례 아닌가. 게다가 살생부를 만들어 피아를 구분하고 관리하겠다는 말을 공식화한 건, 이런 행위가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범죄라는 문제의식 자체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는 함께 일하는 동료 사원들에 대한 협박이기도 하다. 당시는 영업이익 성과급 지급을 두고 총파업이 거론되던 민감한 시기였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겠다는 논리도 이상하다. 노조 편에 서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뜻일 텐데, 의사 결정 자유가 있는 민주 사회에서 생각이 다르면 해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 것 아닌가. 만약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이런 말과 행동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삼성전자에서 초기업노조와 함께 양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의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24년 첫 총파업 주도 과정에서 파업 불참자를 사내 소통방과 민간 메신저 등에서 '배신자', '무임승차자'로 공공연히 조롱하고 비방하는 등 압박을 넘어 심리적 매장 행위를 거리낌 없이 했다. 근무 부서를 포함한 신상을 유포하며 집단으로 사적 제재도 가했다. 서류상 블랙 리스트를 만든 정황은 없지만 내부의 적을 지목해 낙인을 찍었다는 점에서 그 폭력성과 반민주성은 다를 바 없다. 살생부의 유무형 여부만 다를 뿐 초기업노조는 제도적 통제를, 전삼노는 심리적 통제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탄생 배경과 속성을 분석해 1951년 출간한 '전체주의의 기원' 한국판./ 2006.12. 21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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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삼전 노조 블랙 리스트 사태는 역설적이다. 블랙 리스트의 피해자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새삼 입증했다. 무엇보다 악(惡)은 악인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들에 의해 일상에서 구현된다는, 미국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론이 떠오른다.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 구역으로 옮기는 임무를 총괄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아렌트가 참관한 뒤 정립한 이론이다. 대중의 예상과 달리 아이히만은 피에 굶주린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집단 속에서 지시를 충실히 수행한, '성실한 관료이자 가족을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에 불과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거악(巨惡)은 사악한 성품이 아니라 비판적 자의식과 성찰 없이 역할에 충실한 평범한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다. 특히 각 개인이 비판적 사유 능력을 상실하고 집단주의, 전체주의가 강한 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지금 한국 사회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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