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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 노동자들, 국내서 비중·역할 확대
20대 키르기스 노동자, 80대 한국인 숙련공 이어 반장으로 활약
중앙아 5개국 중 4개국이 고용허가제 송출국…가족 동반 늘며 지역사회 정착

(울산=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난 6월 22일 울산의 한 조선소에서 우즈베키스탄 출신 이주노동자인 마브로니 파요르존(32) 씨가 발판 설치 작업을 하는 모습. 2026.9.3 airan@yna.co.kr
(울산·김해·안산=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난 6월 22일 울산 동구 방어진에 자리한 한 조선소. 골리앗 크레인들이 늘어선 636만㎡(192만평)의 부지 한쪽 독(dock)에 점차 형태를 갖춰가는 액화석유가스(LPG) 운반선의 골조가 우뚝 서 있었다.
주황색 안전모와 보안경, 안전화를 착용한 마브로니 파요르존(32) 씨가 지상 5m 높이의 구조물 위에 선 채 몸의 중심을 잡았다. 장갑 낀 손으로 시노(공구)를 쥐고 철사를 조이자 2m 길이의 철제 발판이 선박 골조에 조금씩 밀착됐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협력사 대명에스엔에스 정종국 소장이 소음을 뚫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파요가 정말 잘해요. 한국인과 비교해도 잘합니다."
'파요'로 불리는 파요르존 씨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다. 2023년 5월부터 발판지원부에서 일하며 다른 작업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선박에 임시 발판을 설치·해체하는 일을 맡고 있다. 팀원 6명 중 2명이 한국인, 4명이 우즈베키스탄인이다. 하루 평균 18∼20개 발판을 작업하는 파요르존 씨는 "배가 안전하게 완성되는 것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며 "제 적성에 딱 맞다"며 웃었다.
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은 더는 부족한 일손을 메우는 '보조 인력'이 아니다. 20∼30대가 주축인 이들은 대한민국 뿌리 산업을 지탱하는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게 현장의 공통된 이야기다. 과거와 달리 단순·반복 작업을 넘어 숙련 작업을 맡거나 팀의 중간 관리자로 일하는 이들을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연합뉴스는 지난 6월부터 울산과 김해, 안산 등지를 돌며 이들의 땀과 삶을 취재했다.

(울산=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난 6월 22일 울산의 한 조선소에서 우즈베키스탄 출신 이주노동자인 마브로니 파요르존(32) 씨를 비롯한 발판 설치팀원들이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TBM)을 하고 있다. 2026.9.3 airan@yna.co.kr
◇ 조선소 숙련공부터 김해 공장 반장까지
앞서 찾은 울산 조선소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협력사까지 합하면 전체 노동자의 약 20%에 달한다. 이 가운데 중앙아시아 출신은 10%를 차지한다. 2010년대 불황기에 조선소를 떠난 한국인 노동자들은 업황 회복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 공백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웠다. 1998년부터 조선업계에 몸담아온 정 소장은 "원래 베트남, 몽골 근로자가 많았는데 요즘은 중앙아시아 출신들이 많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타지키스탄 출신 후모윤이(32) 씨도 조선소 입사 6년차다. 선행도장부 소속인 그가 스프레이 사수 역할을 맡은 지 3년이 넘었다. 철판이 산화·부식되지 않도록 페인트를 덧바르는 도장은 도막(도료가 생긴 막) 두께와 상태를 정밀하게 맞춰야 하는 숙련 작업이다.
"처음엔 1년 넘게 보조하면서 (페인트) 믹스를 만들었어요. 아래에서 조수 역할을 하다가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면서 스프레이 작업에 흥미를 느꼈어요."
그는 "도막 검사를 통과 못 하면 블록에 들어가서 다시 작업해야 한다"며 "이제 어느 정도 뿌리면 통과하겠다는 감이 딱 온다"고 말했다. 2017년 한국에 처음 들어와 대구의 한 대학에서 유학한 그의 한국어는 막힘이 없었다.
12명으로 구성된 그의 팀에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여럿이다. 팀별로 이뤄지는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TBM)에서 만난 한국인 조장은 "외국인 친구들이 들어오면 핸드폰 번역앱부터 켜거나 통역사를 불러야 하는데 후모윤이가 한국말을 잘해 통역까지 맡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울산=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난 6월 22일 울산의 한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타지키스탄 출신 후모윤이(32) 씨가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6.9.3 airan@yna.co.kr
중소·영세업체로 갈수록 중앙아시아 이주노동자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김해시 한림면·진례면·진영읍 등 외곽에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중소·영세기업이 몰려 있다. 김해시에 따르면 종업원이 10명 이내인 영세·중소 기업체가 전체의 81.7%를 차지한다. 이들 회사의 한국인 근로자 다수는 퇴직 연령을 훌쩍 넘겼다. 고령화한 한국인 근로자의 빈자리를 중앙아시아 청년들이 대신 채우고 있다.
지난 7월 26일 김해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만난 키르기스스탄 출신 백술탄(23) 씨도 그중 한 명이다. 한림면의 신발부품 제조업체 동경케미칼에서 일하는 그는 반장을 맡고 있다.
2년 전 입국한 백술탄 씨는 회사 2공장을 거쳐 1공장에서 근무 중이다. 쉬는 날엔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한국어 공부에 매진한다. 함께 일하던 여든 살 한국인 동료는 그에게 "네가 잘 배우니까 반장을 맡으라"며 자리를 물려줬다. 아들뻘, 아니 손자뻘 되는 후배에게 반장 자리가 넘어간 셈이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한 명씩 짝을 지어 일하는 이 공장에서는 세대가 국적을 건너 이어지고 있었다.

(김해=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난 7월 26일 김해시 서상동 김해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만난 키르기스스탄 출신 백술탄(23) 씨. 그는 김해 한림면의 신발부품 제조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본인 제공] 2026.9.3 airan@yna.co.kr
◇ 돈 벌어 고국 돌아가려다…한국으로 가족 부르는 노동자들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의 증가는 정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법무부가 집계한 '2024년 12월 체류외국인 통계'에 따르면 중국(36.2%), 베트남(11.5%), 태국(7.1%), 미국(6.4%)에 이어 우즈베키스탄이 9만4천893명(3.6%)으로 5위에 올랐다. 과거 10위권 밖이었던 우즈베키스탄의 5위권 진입은 국내 산업 현장에서 중앙아 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었음을 보여준다.
노동 이주의 공식 통로에서도 중앙아시아 비중이 커지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14일 카자흐스탄을 고용허가제(EPS)의 18번째 인력 송출국으로 새로 지정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 5개국 중에서 한국에 인력을 보낼 수 있는 나라는 기존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3개국에서 4개국으로 늘었다. 카자흐 노동자들은 2028년부터 한국 산업 현장에 뛰어들 예정이다.
특히 단기 취업과 송금이 목적이었던 중앙아시아 이주노동자 중 장기 체류와 가족 동반을 계획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김해 진례면의 자동차 부품회사 부국정공에서 일하는 카산벡(36) 씨는 지난해 비전문취업(E-9) 비자를 가족의 동반 초청이 가능한 특정활동(E-7) 비자로 바꿨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아내와 8살, 6살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다"라고 말했다. 카산벡 씨가 한국에 온 것도 14년 전 먼저 한국에 들어와 김해 주촌면의 한 회사에서 근무 중인 친형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김해=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난 7월 26일 찾은 김해시 서상동 김해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2026.9.3 airan@yna.co.kr
신지윤 김해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교육팀장은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공장 운영이) 완전 끊기기 때문에 회사로서도 어떻게든 정주시키려 한다"며 "사업주들이 외국인 비자를 E-7 비자로 바꾸게 하려고 더 적극적"이라고 설명했다.
비자 변경에 필요한 사회통합프로그램(KIIP) 이수를 위해 직원이 평일 김해대학교 과정을 다닐 수 있게 적극 지원하는 사업주도 있다는 게 신 팀장의 설명이다.
울산에서 만난 파요르존씨 또한 "여기 정착하는 게 목표"라며 "5살, 2살 두 아들을 한국에서 공부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E-7 비자 변경을 위해 한국어 공부와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에 몰두하고 있다.
특히 언어 소통이 작업 안전 및 숙련도와 직결되는 만큼, 기업 차원의 대응도 본격화하고 있다. 울산의 한 조선업체는 울산대와 협력해 '한국어 평가' 시스템을 자체 개발한 뒤 2024년 12월부터 교육·평가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정착까지 이어진 사례도 늘고 있다. 앞서 만난 후모윤이 씨는 아내와 4살·2살 아이와 함께 방어진에서 거주 중이다. 뛰어난 축구 실력으로 울산시 동구 조기축구팀의 유일한 외국인 멤버인 그는 "한국에 계속 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울산=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난 6월 21일 울산의 한 조선소 인근에 새로 들어선 고려인 마트에 러시아산 초콜릿이 진열돼 있다. 2026.9.3 airan@yna.co.kr
◇ 한복집 한 곳 남고 우즈베크 식당은 북적…기업 기숙사는 고려인마을로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전국 곳곳에 일종의 생활권이 형성되고 있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이들은 안산·화성시 등 수도권 산업도시와 중소 제조업체가 밀집한 충남 아산·경남 김해·경북 경산 등지에 주로 모여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80년 넘는 역사를 이어온 김해 동상시장의 풍경도 달라졌다. 주말이면 일주일 치 식재료를 사고 친구를 만나거나 머리를 손질하려는 외국인들로 붐빈다. 이들을 위해 은행과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또한 일요일에 문을 연다.
한복 가게를 25년째 운영해온 송모(76) 사장은 "원래 한복집이 10군데 있었는데 지금은 나만 남았다"며 "처음엔 중국 사람, 그다음엔 베트남 사람 오다가 지금은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설명했다.
기자가 머무는 동안 한복집을 찾은 손님은 제사 한복 가격을 알아보러 온 1명뿐이었다. 반면 몇 걸음 떨어진 우즈베크 식당 '사마르칸트'는 삼사(만두)와 샤슬릭(꼬치 요리)을 찾는 이국적인 외모의 손님들로 내내 붐볐다.
김해만의 일이 아니다. 국내 최대 고려인 집단거주지로 꼽히는 경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땟골마을에는 우즈베키스탄·러시아·카자흐스탄 등 옛소련권 국적의 주민 7천여명이 모여 산다.

(김해=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난 7월 26일 경남 김해시 서상동 외국인거리의 한 우즈베키스탄 식당 진열대에 전통 빵 '삼사'(Somsa)를 비롯해 각종 빵이 진열되어 있다. 2026.9.3 airan@yna.co.kr
1990년대까지만 해도 삼보컴퓨터, 모나미 등 국내 기업들의 공장과 기숙사 등이 모여 있던 지역은 인근 반월·시화공단으로 출퇴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생활 거점으로 바뀌었다. 한 60대 미용실 사장은 "우리도 손님의 80%가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출신"이라며 "예전엔 중국인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쪽 사람이 대다수"라고 전했다.
이주노동자들이 늘지만, 원주민들이 체감하는 지역 상권과의 접점은 여전히 제한적이란 지적도 있다.
조선소가 자리한 울산 동구도 지난해 '외국인 1만명' 시대를 맞았지만 정작 기존 상권은 썰렁했다. 문을 닫은 점포도 적지 않았다. 가게 문을 열어둔 채 손님을 기다리던 낚시용품점 주인은 "외국인들은 자기네 마트와 식당만 가고, 어쩌다 와도 가격을 깎으려고만 든다"고 했고, 인근 식당 주인도 "외국인들이 좋아한다는 반찬도 일부러 내놓고 했는데 아예 안 온다"며 고개를 저었다.
◇ 산재·고용불안은 여전…'노동력 넘어 이웃으로' 사회적 준비 필요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이제는 지역사회에서까지 중앙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의 존재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단순한 노동력을 넘어 온전한 이웃으로 맞아들일 사회적 준비는 미흡하다.
임금체불·폭력 등 이른바 '사장님 나빠요'로 대변되는 비인간적인 처우는 10년 전보다는 대체로 줄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장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도 대체로 주52시간제와 근로수당 지급 등에서 한국 노동법이 지켜지고 있다고 전했다. 권순길 안산외국인주민상담지원센터장은 "요즘은 센터에서 사업주들에게 문제가 되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나중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대개 고치려 한다"고 설명했다.

(안산=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난 8월 12일 찾은 경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의 고려인 마을인 땟골마을. 한국어 간판과 러시아어 간판이 섞인 가게들이 눈에 띈다. 2026.9.3 airan@yna.co.kr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처우 개선과 달리, 구조적인 문제는 여전하다.
고위험 작업 현장에 집중 배치되면서 중대재해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지난 7월 울산의 한 조선소에서 우즈베키스탄 국적 20대 노동자가 끼임 사고를 당해 숨진 것이 단적인 예다.
저임금 구조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금속노조가 지난해 8∼9월 국내 대형 조선소 근무자 504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53.8%)은 평균 250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는다고 답했다. 숙련기능 인력인 E-7-3 비자 소지자 가운데 '250만원 미만 수령 비율'은 더 높았다. 계약서상 임금과 실제 수령액이 다른 이중계약 관행, 숙소비·식비 등 각종 명목의 공제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부당한 대우나 열악한 근무 환경을 겪어도 다른 일터로 옮기기 쉽지 않은 제도적 한계에 있다. 지난해 11월 열린 '울산지역 조선업 종사 이주노동자 인권증진 토론회'에서 김현주 울산이주민센터장은 "비전문취업(E-9) 체류자격 노동자들은 조선소를 떠날 수 없다"며 "사업장 변경 제한으로 이주노동자를 사업주에 종속시켜 강제노동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불안은 작업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외 경기 변동에 가장 취약한 만큼, 최근 미국·이란 전쟁 장기화 등의 여파로 김해 등 일부 지역에서는 일을 쉬거나 아예 그만두는 사례도 목격됐다.
산업현장을 떠받치는 이들을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 일터의 안전과 임금, 고용 안정성, 지역사회에서의 삶까지 함께 살피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울산 조선소로 향하는 길에 만난 박수한(80)씨는 "정주영 회장이 깃발을 꽂던" 196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택시를 몰며 공업도시의 변화상을 지켜봤다고 했다. "울산에 기업이 수천 개인데 외국인이 없으면 몬해 먹어요. 다 문 닫아야 합니다. 이제 사람이 없는데 외국인이 일해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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