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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윤선희 선임기자 = # 1945년 서울역사는 몸살을 앓았다. 만주, 일본, 중국 등지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와 월남민들이 매일 수천명씩 속속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당시 경성)은 광복 직후 인구 폭증을 감당하지 못했다. 1945∼1948년 약 200만 명의 인구가 한꺼번에 유입되면서 서울에는 판자촌과 토막집이 급증했다. 토막집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와 비바람만 겨우 피한 집이었다. 집을 구하지 못한 이들이 이태원, 창신동, 남산자락 등 산비탈과 청계천변에 거적과 판자로 집을 지어 살았다.
'전세'와 '셋방'이라는 한국 특유의 임대차 문화가 생겨난 것도 이때이다. 집이 부족하다 보니 적산가옥(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 한 채에 여러 가구가 들어 살며 방을 나눠 쓰던 방 쪼개기(셋방)가 유행했다.
전세제도는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에게 환영받았다. 집주인은 세입자에게서 전세 보증금을 받아 집을 사거나 개조하고, 세입자는 월세를 내지 않고 거주하면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는 현재까지 한국의 독특한 주거 금융으로 남아 있다.
광복 직후 적산가옥을 불하받은 이들은 헐값에 서울 핵심지의 대지와 건물을 갖게 됐지만, 연고가 없는 이들은 판자촌(달동네)으로 밀려났다.
# 판자촌은 6·25 전쟁 이후 도시 전체로 확산했다.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면서 적산가옥을 포함한 주택들도 화재와 폭격으로 사라졌다.
피난 갔던 서울 시민과 전쟁 피난민, 그리고 월남민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국유지나 공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았다. 도심 빈터나 산비탈, 청계천변, 개천가에도 판자촌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전쟁 전 사대문 안과 용산, 영등포 일대에 불과하던 서울의 경계선도 전쟁 이후 도심이 파괴되고 피난민이 급증하면서 외곽으로 밀려났다. 1963년에서야 강남, 은평, 도봉, 중랑 등이 서울로 편입됐다.

폐허 위에서 판자촌 철거와 재개발, 공공주택 공급 등의 현대적인 도시 개발이 비로소 시작됐다.
전쟁으로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금융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신뢰할 수 있는 자산은 땅과 집뿐'이라는 인식이 확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류층과 신흥 자본가들은 남대문, 종로 등 서울 도심의 대지나 주요 입지의 토지를 사들였고, 많은 인구가 몰려들면서 비좁은 서울 도심의 토지 가격은 폭등했다. 이는 1960∼1970년대 부동산 투기 열풍의 씨앗이 됐다.
현재까지 우리 사회를 괴롭히는 수도권 인구 집중과 주택 공급 부족, 부동산 중심의 자산 증식 관행, 주거 양극화 등의 부동산 문제는 일제 강점과 전쟁이라는 뼈아픈 역사와 함께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겠다.
indig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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