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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만 있는 골뱅이, 북해산까지 한국서 대부분 싹쓸이
직장인 애환 함께한 '소울 푸드' 골뱅이무침, 골뱅이 수요 폭증 계기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우리가 '골뱅이'라 부르는 생물은 냉수성 심해 연체동물인 '물레고둥'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선 동해안에서만 잡히는 고급 해산물이다.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인근 북대서양 찬 바다에도 친척 격인 '북해 물레고둥'이 서식한다. 한국산 골뱅이보다 크고 껍데기가 두꺼운데, 통조림 골뱅이는 대부분 이걸 가공한다. 사실 이 두 종만 골뱅이로 부르는 게 맞지만, 식감이 비슷한 일부 우렁이류와 소라류도 골뱅이로 통칭한다. 서해와 남해에서 잡히는 큰구슬우렁이, 뿔소라, 피뿔고둥 등이 슬그머니 골뱅이로 불리기도 한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종이 다른 것들을 시장에서 골뱅이라 칭하며 파는 건 그만큼 귀해서다. 골뱅이는 양식이 불가능해 자연 채취에만 의존하므로 공급에 한계가 있다. 그러니 '100% 자연산 골뱅이'란 광고는 사실 의미 없는 말이다. 골뱅이는 알에서 깨어나 성체까지 자라는 데 최대 5년 넘게 걸릴 만큼 성장 속도마저 느리다. 게다가 수심 100~400m 깊은 바다까지 배를 몰고 가 통발을 깊이 내려 잡아야 하니 비용과 노동력도 많이 든다. 수요가 커질 경우 비슷한 대체품을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이 귀한 골뱅이를 즐겨 먹는 나라는 한국이 사실상 유일하다는 점이다. 세계 골뱅이 어획량의 무려 90% 이상이 한국인 입으로 들어간다. 외국인들이 골뱅이의 생김새와 질긴 식감, 비린내에 거부감을 느끼는 데다 이를 극복할 요리법도 발달하지 않아서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 등지에도 골뱅이 요리가 있지만 대중적이진 않다. 그래서 북해 인근 국가들은 골뱅이를 거의 전량 한국으로 수출한다. 잡히는 대로 버렸던 골뱅이가 수출 효자 상품으로 변신했고, 한국에서는 골뱅이 품귀와 가격 급등을 막을 수 있으니 '윈-윈 사례'의 모범이다.
처음부터 골뱅이가 우리에게 대중적인 인기 음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골뱅이가 지금의 '국민 안주' 지위를 얻게 됐을까. 결정적 계기는 1980년대에 생맥주와 골뱅이무침을 대표 메뉴로 파는 '호프집'이 유행처럼 전국으로 번지면서부터다. 특히 서울 도심 을지로 3가 일대에는 '직장인 대폿집 문화'를 상징하는 '을지로 골뱅이 골목'이 산업화가 본격화한 1970년 전후로 형성됐다. 근처 공구상가와 인쇄소 직원, 사무직 사원 등이 퇴근길에 들러 하루의 피로를 풀던, 직장인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촬영 이충원]
골뱅이를 툭툭 썰어 파채와 북어채를 넣고 굵은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을 한 움큼 뿌려 버무린 알싸한 맛은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영혼의 안주'였다. 시원한 생맥주 한 모금을 털어 넣고 골뱅이를 씹으면, 상사에게 깨지고 업무에 시달리며 받은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듯했다. 특히 주머니가 가볍던 당시 직장인들에게 맥주에 곁들이는 골뱅이 소면 무침과 '서비스 어묵탕'은 부담스럽지 않게 배를 채우며 회포를 풀 수 있게 해주는 가성비 만찬이었다.
이처럼 골뱅이는 한국인에게 단순한 음식 이상의 '소울 푸드'로 자리매김했다. 퇴근길에 "맥주에 골뱅이 어때?"가 동료에게 친근함을 전하는 인사말처럼 여겨진다. 골뱅이가 우리 일상에 깊이 들어온 사례는 꽤 많다. 이메일 주소를 알려줄 때 아이디와 도메인 사이 기호 @을 원어인 '앳'(at)이 아닌 '골뱅이'로 읽는 게 관용적 표준이 됐을 정도다. 술에 취한 사람 자체를 '골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코미디 소재로도 종종 쓰인다. 과거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아줌마 여기 골뱅이 한 접시 더"를 외치던 취객 주인공이 인기를 끌던 기억도 난다.
골뱅이무침은 치킨과 함께 생맥줏집 필수 안주다. 전국 어디를 가도 골뱅이 없는 호프집을 본 적 없다. 매일 밤 전국 술집에서 엄청난 양의 골뱅이가 소비되자 동해안에서 나오는 물량으론 턱 없이 부족해졌고, 이때 국내 식품업체들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골뱅이가 북대서양 연안에 꽤 많이 있는데도 현지인들이 먹지 않아 오히려 어민들에게 골칫거리라는 귀한 정보를 입수하고 쾌재를 불렀다. 현지 어민들과 납품 계약을 체결하고 통조림 가공 라인을 만들어 대량으로 북해산 골뱅이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수입산 골뱅이 통조림의 탄생 일화이자 한국인이 세계 골뱅이를 싹쓸이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을지로 호프집 골목이 만들어낸 골뱅이무침 안주는 이처럼 글로벌 나비 효과를 낳았다. 새로운 식문화가 창조한 거대 수요가 영국과 아일랜드 일부 어촌의 수익 모델을 완전히 재편한 것이다. 골뱅이 조업이 주요 생계 수단이 된 웨일스 어민들은 북핵 문제 같은 한반도 안보 소식에도 민감하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골뱅이를 계속 많이 먹도록 한국 안보와 경제가 안정되길 기도한다는 농담 섞인 이야기가 돌 정도다. 세계 수산물 무역 시장에서 골뱅이 단일 품목을 한국이란 단일 국가가 사실상 독점하는 독특하고 기이한 구조도 탄생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촬영 이충원]
생태학적으로도 한국인은 골뱅이의 최대 천적이 됐다. 원래 골뱅이의 생물학적 천적은 게, 바닷가재, 불가사리, 넙치 등이지만 세계 곳곳에 서식하는 골뱅이들까지 대량으로 먹어 치우는 한국인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 북해 차가운 밑바닥에서 조용히 살던 골뱅이 입장에선 을지로 골목까지 끌려와 술상에 오르는 운명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세계가 점점 연결을 강화하고 있다는 진리를 새삼 되새기게 한다.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니 시원한 맥주에 골뱅이 안주가 생각나는 분들도 있겠다. 단 과음은 금물, 음주운전 절대 금지다.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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