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K-팝의 비트와 K-드라마의 서사가 전 세계인의 일상에 스며든 지금, 대한민국의 미각을 담은 K-푸드 역시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근 몇 년간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성장 궤적을 그리는 분야는 단연 주류(K-Liquor)다.

2023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케이콘(KCON) 2023 태국' 행사장 내 하이트진로 부스에서 현지 관람객들이 과일소주를 시음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하이트진로 제공]
과거 한인 마트 구석을 지키던 '초록색 병'은 이제 글로벌 현지인들의 파티 테이블 중심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선봉에는 특유의 달콤함과 다채로운 색채로 무장한 K-리큐르의 대표 주자, '과일소주'(Fruit Soju)가 있다.
과일소주의 글로벌 판매 호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시계를 2015년의 대한민국으로 되돌려야 한다. 당시 유자향을 첨가한 알코올 도수 14도의 소주가 출시되자마자 시장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이른바 '품귀 현상'을 빚으며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진풍경이 벌어졌다. 뒤이어 자몽, 청포도, 복숭아, 사과 등 온갖 과일 맛을 품은 소주가 앞다퉈 쏟아져 나왔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러한 현상은 신제품 출시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오랫동안 한국의 소주는 고된 하루를 달래는 '독하고 쓴 술', 혹은 회식 자리에서 빠르게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달콤하고 향긋한 과일소주의 등장은 주류 문화의 패러다임을 '취하기 위한 것'에서 '즐기기 위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알코올 특유의 역한 냄새에 거부감을 느끼던 젊은 층과 여성 소비자가 열광했고, 술자리의 분위기는 한층 가볍고 화사해졌다.
비록 국내 시장에서는 몇 년의 열풍 이후 다시 오리지널 소주나 하이볼, 맥주 등으로 트렌드가 분산되며 그 인기가 한풀 꺾였지만, 과일소주의 진짜 무대는 한국이 아니었다. 바다를 건너간 이 달콤한 리큐르는 전혀 새로운 시장에서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국내 주류 수출 통계를 살펴보면 과일소주의 약진은 눈부시다. 전체 소주 수출액 중 과일소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년 가파르게 상승하며 절반 이상을 넘어선 지 오래다.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전통적인 위스키와 와인의 본고장인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도 놀라운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과연 무엇이 세계인들이 이 낯선 K-리큐르에 열광하게 만들었을까?
첫 번째는 '맛의 직관성'이다. 전통적인 소주는 외국인들에게 보드카나 진처럼 무색무취의 독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반면, 청포도나 딸기, 복숭아 맛 소주는 알코올의 쓴맛을 과일의 달콤함이 완벽하게 감싸준다. 알코올 도수 역시 12~13도 수준으로 와인과 비슷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이른바 'RTD'(Ready To Drink) 주류나 칵테일을 선호하는 글로벌 2030 세대의 입맛을 정확히 관통한 것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두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원동력은 바로 'K-콘텐츠'다.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한국 드라마 속에는 주인공들이 포장마차나 식당에서 마주 앉아 초록색 병을 기울이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작은 잔에 술을 따르고 "건배!"를 외치며 원샷을 하는 역동적인 음주 문화는 외국인들에게 일종의 '힙(Hip)한 놀이'로 인식되었다. 과일소주는 이 매력적인 K-문화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가장 달콤하고 진입 장벽이 낮은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과일소주의 수요가 폭발적인 동남아시아 시장에서는 흥미로운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현지의 주류 제조사들이 앞다투어 '한국식 과일소주'를 직접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리핀, 베트남 등지의 대형 마트와 편의점 매대에는 한국 소주와 똑같은 초록색 병에 어설픈 한글 라벨을 붙인 로컬 주류가 자리를 꿰차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러한 '미투'(Me-Too) 제품의 범람은 한국 과일소주의 위상이 하나의 수입 주류를 넘어, 동남아시아 현지에서 하나의 거대한 '독자적인 주류 카테고리'로 굳어졌음을 방증한다. 비록 한국 주류업계에는 상표권 침해와 품질 저하로 인한 이미지 훼손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줬지만, 역설적으로 K-리큐르가 현지인들의 일상적인 소비재로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이기도 하다.
상업적인 대중 주류인 과일소주의 글로벌 붐은 결과적으로 한국 전통주 시장에도 새로운 영감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해외 소비자들이 한국의 과일 맛 술에 친숙해지면서, 그 관심이 자연스럽게 한국의 전통적인 과실주와 프리미엄 K-리큐르로 확장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척박한 주류 역사 속에서도 가양주(家釀酒) 형태로 전해 내려오던 훌륭한 과실 리큐르가 존재한다. 매실, 복분자, 오미자, 유자 등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과 토양에서 자란 특산물들은 서양의 베리나 시트러스류와는 결이 다른 깊고 오묘한 풍미를 자랑한다.
최근 국내 전통주 양조장은 이러한 지역 특산물을 활용해 인공 향료가 아닌 천연 과즙과 전통 증류주를 배합한 프리미엄 K-리큐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문경의 오미자로 빚어낸 영롱한 붉은빛의 리큐르, 고흥의 유자를 듬뿍 담아 상큼함을 극대화한 유자주, 제주의 귤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증류주 등은 대량 생산되는 과일소주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와 예술성을 보여준다. 대중적인 과일소주가 K-리큐르의 문을 여는 '문고리' 역할을 했다면, 이들 프리미엄 로컬 주류는 그 문턱을 넘어온 세계인들에게 한국 술의 진정한 깊이와 미학을 보여주는 훌륭한 응접실이 될 것이다.
물론 장밋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일소주가 지금의 기세를 이어가며 K-리큐르라는 확고한 카테고리로 글로벌 시장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가장 시급한 것은 '싸구려 파티 술'이라는 이미지의 탈피다. 동남아시아의 저가 미투 제품들이 보여주듯, 장기적인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는 품질의 고급화가 필수적이다. 앞서 언급한 전통주 기반의 프리미엄 리큐르와의 연계 마케팅을 통해 한국 주류 전반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또한, 현지화 전략도 정교해져야 한다. 그저 국내에서 유행했던 맛을 그대로 수출하는 것을 넘어, 현지인들의 식문화와 선호하는 과일 향을 분석해 맞춤형 제품을 개발하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아가 각국의 엄격한 주류 규제와 라벨링, 유통망 확보 등 복잡한 비관세 장벽을 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외교적 지원과 협력도 절실하다.
하나의 문화가 세계인의 일상으로 녹아드는 과정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위스키가 그랬고, 멕시코의 데킬라가 그랬듯, 고유의 스토리와 품질, 그리고 이를 즐기는 매력적인 문화가 삼위일체를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글로벌 주류로 인정받을 수 있다.
초록병에 담긴 달콤한 과일소주는 세계인들에게 한국 주류의 존재를 각인시킨 훌륭한 신호탄이었다. 이제는 이 달콤한 첫인상을 넘어, 우리 술이 가진 오랜 역사와 장인 정신, 그리고 각 지역의 풍토가 빚어낸 예술적인 K-리큐르의 진면목을 세계 무대에 꺼내 보여줄 때다. '건배'라는 경쾌한 외침 속에 담긴 한국 술의 달콤한 마법은, 이제 막 진짜 이야기를 시작했을 뿐이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Copyright 연합뉴스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상품 확인하고 계속 읽어보세요!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