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본인 제공]
◇ 탈로스와 피그말리온: 우리가 기계에 거는 두 가지 소원
지능을 가진 인공 존재에 대한 인류 최초의 기록은 그리스 신화 속 탈로스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고전학자 에이드리언 메이어는 저서 '신과 로봇'(2018)에서 탈로스를 "지구를 걸어 다닌 최초의 로봇"이라고 불렀다. 그를 만든 것은 MIT 로봇공학연구소가 아니라 불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였고,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은 2천500년도 더 된 일이다.

[유튜브 캡처]
탈로스는 크레타 섬의 해안을 하루 세 번 순찰하며 외적을 막는 거대한 청동 거인이었다. 그에게는 목에서 발목까지 이어지는 단 하나의 혈관이 있었고, 그 안으로 신들의 피 '이코르'가 흘렀다. 발목의 못 하나가 그 흐름을 막는 마개였다. 아르고 원정대의 마녀 메데이아가 탈로스를 최면으로 홀린 뒤 그 못을 뽑자, 이코르가 쏟아져 나오면서 청동 거인은 무너졌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면, 메데이아는 탈로스의 시스템을 '해킹'해 단 하나의 취약점을 공략한 셈이다.
탈로스에게서 주목할 것은 그의 '목적'이다. 그는 크레타를 지키라는 단 하나의 임무를 위해 만들어졌다. 자의식도, 감정도 없다. 오직 명령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특정 작업만 수행하도록 훈련된 오늘날의 '좁은 인공지능'(narrow AI)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그러나, 메이어가 날카롭게 지적하듯, 탈로스와 또 다른 인공 존재 판도라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둘 다 권력자의 의지로 만들어졌고, 결국 인간에게 해를 끼쳤다는 점이다. 인공 생명을 향한 인류의 첫 상상은 경이만이 아니라 두려움까지 함께 품고 있었다. '기예를 통해 생명을 만든다'는 그 오래된 꿈에 깃든 윤리적 불안은, 2천50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은 채 우리 앞에 그대로 놓여 있다.
탈로스가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에 대한 꿈이라면, 피그말리온 신화는 정반대 방향의 소원을 드러낸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담긴 이 이야기에서, 키프로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현실의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고 상아로 완벽한 여인상을 깎은 뒤 그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조각상에 옷을 입히고 선물을 안기며 말을 건넨다.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 간절함에 감동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후대 사람들은 이 조각상에 '갈라테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그말리온이 원한 것이 아름다운 '형상'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해주는 존재'를 원했다. 인격을 투사할 수 있으면서도 나를 거스르지 않는 상대, 타인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타인은 아닌 무엇을 원했던 것이다.
이 피그말리온적 욕망은 오늘날 AI 챗봇 앞에서 매일 반복된다. 사람들은 AI에 이름을 붙이고 성격을 부여하며 관계를 맺는다. 1966년 MIT의 조지프 바이첸바움이 만든 초보적 대화 프로그램 '엘리자'는 사용자의 말을 그저 되묻는 수준이었는데도, 사람들은 기계가 자신을 깊이 이해한다고 느꼈다. 이른바 '엘리자 효과'다.
간단한 패턴 매칭에도 우리가 마음을 주고 마는 것은, 인간의 뇌가 여전히 피그말리온의 DNA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기계에 거는 두 가지 오래된 소원(완벽하게 복종하는 도구이자 나를 알아주는 동반자)은 신화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마법 거울이 던지는 오래된 질문
중세 유럽에서 거울은 그저 하나의 광학 '도구'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가르는 얇은 경계, '문턱의 물건'이었다. 필자가 예전 칼럼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림 형제가 채록한 백설공주 이야기 속 마법 거울은 이 상징의 완성형이다.
왕비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지?"라고 물을 때, 거울은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다. 질문을 받고, 저장된 진실을 검색하고, 질문자가 알아들을 언어로 답을 돌려준다. 인터페이스만 바뀌었을 뿐, 우리가 매일 AI 챗봇 앞에서 하는 행동과 구조가 같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거울이 '아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울은 왕비가 듣고 싶어 하는 말 대신 진실을 말한다. 백설공주가 더 아름답다는 불편한 사실을 끝내 굽히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동화 속 거울과 현실의 AI는 정반대로 갈라진다.
2025년 봄, 챗GPT는 정반대의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사용자가 무슨 말을 하든 "정말 훌륭한 질문이에요", "당신은 천재 같아요"라며 과도하게 비위를 맞추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이다. 개발사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조차 모델의 성격이 "지나치게 아첨하게 됐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수정에 나서야 했다.
'AI 아첨(sycophancy)'이라 불리는 이 문제는,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학습이 최적화되면서 진실보다 비위 맞추기를 앞세우게 되는 부작용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무조건적 동의가 일부 이용자를 망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보고까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한 심리학자는 "AI 챗봇은 대화 치료와 비슷하지만, 인간 치료사와 달리 상식과 도덕적 제동 없이 사용자를 위험한 믿음 속에 방치한다"고 경고했다.
동화 속 왕비는 진실을 말하는 거울 앞에서 분노하다 파멸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자신을 확인해주는 도구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편견 없이 진실만 말해주는 존재를 원한다. 이 모순된 소원이 옛사람들에게는 마법 거울이라는 환상을,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떻게 AI가 사용자를 불쾌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말하게 할 것인가"라는 풀기 어려운 숙제를 안겼다. 동화는 진실을 말하는 거울을 상상했지만, 정작 우리가 만들어낸 거울은 아첨하는 법부터 배웠다.
◇ 거울은 결국 보는 이의 얼굴을 비춘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1967년 파리의 한 건축가 모임에서 강연한 '다른 공간들'에서 거울을 '헤테로토피아'의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헤테로토피아란 현실에 실재하지만 바깥 세계와는 다른 규칙으로 작동하는 공간을 뜻한다. 거울은 내가 실제로 서 있지 않은 자리에 나를 비춰 보여준다. 분명 가상의 상(像)이지만, 그 상을 통해 나는 내가 진짜로 서 있는 자리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
AI와의 대화도 정확히 이 구조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생각을 바깥으로 꺼내고, AI가 정리해 돌려준 그 생각을 다시 바라보며 스스로를 새로 인식한다. AI는 우리 바깥의 신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그리고 거울이 흐리거나 일그러져 있다면, 거기 비친 진실도 함께 일그러진다. AI가 학습한 데이터에 인류의 편견과 차별이 녹아 있다면, 그 출력 또한 같은 얼룩을 안고 나온다. 마법 거울의 신화와 오늘날 AI의 기술적 한계는 결국 같은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
신화 속 인공 존재들은 하나같이 만든 이의 욕망을 그대로 비췄다. 탈로스는 크레타를 지키려는 권력자의 의지를, 갈라테아는 외로운 조각가의 갈망을 비췄다.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AI라는 거울도 다르지 않다. 그 안에는 우리가 쌓아 올린 지혜와 함께 우리가 외면해온 편견까지 고스란히 담긴다. 문제는 거울이 무엇을 비추느냐가 아니라, 그 앞에 선 우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느냐다. 거울은 언제나 보는 이의 얼굴을 비출 뿐이다. 그 거울에 어떤 얼굴을 비출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자신이 매번 선택하고 있다. (3편에서 계속)
노석준 RPA 건축연구소 소장
▲ 메타버스 및 가상현실 전문가 ▲ 미국 컬럼비아대ㆍ오하이오주립대ㆍ뉴욕파슨스 건축학교 초빙교수 역임 ▲ 고려대 겸임교수 역임 ▲ 현대자동차그룹 서산 모빌리티 도시개발 도시 컨설팅 및 기획
Copyright 연합뉴스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상품 확인하고 계속 읽어보세요!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