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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인물열전] (22)리비아 혁명가에서 독재자로 최후 맞은 카다피

입력 2026-05-30 08: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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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머니로 한때 '복지국가' 구현…동아건설 주도한 대수로 공사 업적


철권통치 42년에 서방과 극한 대립…'아랍의 봄' 격랑 속 허망한 종말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세진 기자 = 리비아를 42년간 통치한 무아마르 카다피는 '사막의 혁명가', '광기의 독재자', '중동의 미친개'라는 극단적인 수식어를 동시에 달고 산 인물이다.


1942년 리비아 시르테 인근 사막에서 베두인족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식민지 경험과 왕정 체제에 대한 반감 속에서 성장했다.


당시 리비아는 친서방 성향의 이드리스 1세 국왕이 통치하던 왕정 국가였다.


카다피는 어린 시절부터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주창한 범아랍주의에 심취해 아랍의 자존을 회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 입대였다.


군인의 길로 들어선 카다피는 나세르의 자유장교단을 롤모델로 삼아 청년 장교들의 비밀조직인 '자유장교운동'을 만들고, 이를 앞세워 1969년 9월 1일 국왕이 해외에 나간 틈을 타 쿠데타를 감행한다.


당시 벵가지 소재 베르카 병영 장악 임무를 맡았던 27세의 카다피 대위는 무혈 쿠데타에 성공한 뒤 단숨에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혁명평의회 의장으로 사실상 국가 원수가 됐다.


하지만 평생 '대령(Colonel)' 계급에 머물렀다.


"혁명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군으로 승진할 수 없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소박한 혁명가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2009년 9월 23일 당시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는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권력을 장악한 카다피는 스스로를 '혁명 지도자'로 칭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부정하는 제3의 이론을 담은 '그린북'(The Green Book)을 내놓는다.


이를 근거로 인민 주권 체제인 '자마히리야'를 선포하고 의회와 정당을 폐지한다. 형식상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권력을 개인과 가문에 집중시키는 철권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반대파를 가차 없이 숙청하는 한편 석유 자원 국유화로 확보한 막대한 오일 머니를 무상 의료·교육, 주택 보급에 투입했다. 그 결과 리비아는 1970년대 중후반 아프리카에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가장 높은 국가 반열에 올랐는데, 이는 카다피 정권의 최대 공적으로 평가된다.


카다피의 집념이 낳은 대수로 공사도 리비아 경제 개발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사하라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북부 해안 도시로 보내는 이 프로젝트는 총연장 4천km에 달하는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동아건설 등 한국 기업들이 주도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카다피는 서방 세계와는 사사건건 충돌하는 외교 노선을 걷는다.


1980년대 들어서는 반서방 무장단체 지원 의혹으로 리비아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기 시작한다. 1986년 독일 베를린에서 터진 디스코텍 테러 사건의 배후로도 지목돼 미국의 공습을 받았고, 당시 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어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발생한 팬암기 폭파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사면서 리비아는 한층 강력한 국제 제재에 직면한다.


이 시기에 카다피는 기행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2009년 3월 31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남미·아랍 정상회의를 앞두고 베두인식 천막에서 카다피(오른쪽)가 미첼 바첼레트 당시 칠레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해외 순방 때 숙소로 베두인식 천막을 고집하는가 하면, 여성 경호단 '아마조니언 가드'를 대동하는 등 일탈적 행보를 이어간다.


아랍권과 관계가 소원해진 후로는 리비아의 외교 축을 아프리카에 두면서 '아프리카의 왕중왕'을 자처해 논란을 야기했다.


그런 카다피였지만 서방권과 대립하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2003년 3월 시작된 미국의 군사 공격으로 몰락하는 걸 목격하고는 대량살상무기(WMD) 포기를 선언하는 등 서방과 관계를 개선하는 노선으로 틀어 영구 집권을 도모한다.


영구 집권할 것 같던 카다피 정권은 그러나 '아랍의 봄'이란 격랑에 휩쓸려 순식간에 종말을 고한다.





2011년 3월 23일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서 한 시민이 옛 리비아 국기 색으로 얼굴을 칠한 채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카다피는 2011년 튀니지에서 촉발된 민주화 시위가 국경을 넘어 리비아에서 확산하자 시위대를 '쥐새끼들'이라고 부르며 강경 진압을 선언한다.


이후 반정부 시위는 내전으로 발전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사 개입으로 우위를 차지한 반군 세력이 결국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자 카다피는 고향 시르테로 달아나 은신한다.


배수관(시궁창)에 숨어 있다가 2011년 10월 20일 발각된 카다피는 69세의 나이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리비아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던 통치자의 허망한 종말이었다.





2011년 3월 5일 리비아 반군이 카다피 초상화를 찢고 있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정확한 사망 경위를 두고는 반군과 교전 중 사망했다는 주장과, 성난 군중의 가혹 행위를 당해 숨졌다는 얘기가 엇갈린다. 시르테에서 은신 중 별도로 붙잡힌 카다피의 넷째 아들이자 국가안보보좌관이던 무타심도 같은 날 반군에 사살당했다.


카다피 부자의 시신은 내전 당시 반카다피 세력의 핵심 거점 도시인 미스라타의 정육점 냉동창고로 옮겨져 시민들에게 공개됐다.


카다피 정권 붕괴 후 리비아는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한 서부 세력과 벵가지에 기반을 둔 동부 세력의 분열로, 불완전한 두 행정부가 어정쩡하게 공존하는 양상이 이어지고 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중재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요체인 선거가 계속 표류하면서 정당과 의회 시스템을 복원하지 못한 채 '실패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카다피의 42년 철권통치가 리비아에 남긴 가장 큰 상처가 민주주의 제도의 파괴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민주주의 제도를 훼손하는 장기 독재는 국가 시스템의 회복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며 "카다피 사후 리비아의 모습은 독재 체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2012년 2월 17일 트리폴리에서 시민들이 카다피 정권 붕괴로 이어진 반정부 봉기 1주년을 기념하며 국기를 흔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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