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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본인 제공]
◇ LA에 들어서는 세계 최초 AI 예술 뮤지엄의 실험
미술관이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을 박제하는 '작품 보관소'에 머물지 않고, 지식과 감각을 실시간으로 재조직하는 동적인 인터페이스가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다음 달 2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다운타운 그랜드 애비뉴 문화지구에 개관을 앞둔 '데이터랜드'(DATALAND)는 인공지능(AI) 전시 공간만이 아니라 거대한 디지털 생태계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리고 그 신호는 멀리 떨어진 한국 디자인계에도 파장을 던진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이 공간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맞은 편, 더 브로드, 현대미술관 MOCA, 콜번 스쿨로 이어지는 다운타운 중심 문화 축 안에 자리한다. 위치 선정 자체가 하나의 선언이다.

[The Grand LA 닷컴 홈페이지 캡처]
AI 기반 예술을 일시적 기술 이벤트나 일회성 흥행 전시로 다루지 않고,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정통 문화 인프라의 핵심 축으로 편입시키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기술이 만들어낸 화려한 시각적 결과물에만 눈을 빼앗기던 우리에게, 데이터랜드는 "AI 시대의 문화기관은 사회적으로 어떤 자리에 놓여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 '작가의 전시장'이 아닌 '플랫폼'이라는 설계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이끄는 두 축의 이력을 보면 데이터랜드가 지향하는 좌표가 한층 또렷해진다. 그 중심에는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과 문화 연구자 겸 기획자인 엡순 에르킬리츠가 있다. 이스탄불 출신의 아나돌은 데이터를 예술의 재료로 삼고 기계지능을 창작의 협업자로 끌어들이는 작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UCLA 디자인미디어아트학과에서 인간과 기계의 경계 속 창의성을 가르쳐 왔다. 공동 설립자 에르킬리츠는 지난 10여년간 전 세계 70여 곳에서 '다학제'(여러 학문 분야가 경계를 허물고 협력하는 방식) 프로젝트'의 기획과 운영을 총괄한 인물이다.
아나돌이 파격적인 예술적 비전을 밀어붙이는 엔진이라면, 에르킬리츠는 그 비전이 실제 제도와 운영 구조 속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단단한 바퀴 역할을 맡는다. 개인 작가의 일시적 전시장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문화 플랫폼의 성격을 띠게 된 배경에는 바로 이 두 전문가의 결합이 있다.

[데이터랜드 홈페이지 캡처]
이 지점은 한국 디자인계가 가장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그동안 한국의 미디어아트 프로젝트는 스타 작가 한 명의 개인전, 혹은 대기업이 후원하는 일회성 미디어 파사드로 소비되는 경향이 짙었다. 작가가 부재하면 프로젝트도 소멸하고, 후원사의 마케팅 주기가 끝나면 공간도 함께 사라진다. '작가-후원사' 양자 구도를 넘어선 '작가-기획자-제도'의 삼각 구조가 부재한 한, 한국형 데이터랜드는 등장하기 어렵다.
◇ '다감각 매체'로서의 AI, 그리고 빈약한 한국의 실험실
데이터랜드의 철학은 공간의 물리적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약 2만 5천 제곱피트 규모 안에 다섯 개의 갤러리를 두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인피니티 룸'(Infinity Room)이 위치한다. 사방에 빔프로젝터 영상을 쏘아 시각적 착시만 주는 일반적인 미디어아트 전시장과는 궤를 달리한다. 인간의 상호작용과 기계지능,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맞물리며 예술이 스스로 진화하는 공간이다.
특히 인피니티 룸은 자연 데이터 모델인 '라지 네이처 모델'(Large Nature Model·LNM)이 생성한 인공 향기와, 공간과 물리적 성질을 완벽히 이해하는 '월드 모델'(World Models) 기반 생성형 AI를 결합한다. 관람객은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는 관조적 태도에서 벗어나 시각·공간감·후각까지 동시에 자극받는 '다감각 환경'을 경험한다. 개관전 '머신 드림스: 레인포레스트' 역시 자연의 지능과 지구의 기억을 AI로 번역해 낸다. 데이터랜드는 AI를 단지 작품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전시의 격식과 관람 방식 자체를 새롭게 짜는 '매체'로 바라본다.

[데이터랜드 홈페이지 캡처]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풍경은 어떠한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미디어 파사드, 국립현대미술관의 미디어 아트 전시, 광화문 일대의 대형 LED 사이니지까지, 한국은 '이미지의 화려함'을 구현하는 데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췄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여전히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화면'에 머문다.
향기·온도·생체 데이터·실시간 환경 정보가 결합한 '다감각 매체'로서의 실험은 일부 기업 쇼룸이나 단발성 페스티벌을 제외하면 제도권 미술관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AI를 '도구'가 아닌 '매체'로 격상시키려면, 작품을 띄울 스크린이 아니라 작품이 살아 있을 환경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인식이 시급하다.
◇ '데이터 윤리'를 자산으로 삼는 발상의 전환
이 거대한 실험을 뒷받침하는 핵심 엔진은 단연 '라지 네이처 모델'이다. 인간이 작성한 텍스트 데이터에 의존해 편향성 문제를 겪는 기존의 대다수 AI 모델과 달리, 식물·동물·균류를 포함한 순수 자연 자료만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로 구축된 오픈소스 AI 모델이다.
기술적 규모도 압도적이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데이터 수집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다. 데이터랜드는 저작권과 환경권을 존중하는 '윤리적으로 수집된 데이터'와 '허가 기반 데이터셋'을 거듭 강조한다. 공식 컬렉션 '바이옴 루미나'(Biome Lumina)는 전 세계 16개 우림 지역에서 직접 수집한 240만 장의 식물·동물·균류 이미지, 열대우림의 실제 소리, 색소 분석 데이터, 그리고 생명체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바이오센서 신호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여기에 레이저로 주변 환경을 3차원 디지털 공간에 정밀하게 옮기는 '라이다'(LiDAR) 기술과, 여러 각도의 사진을 바탕으로 입체 모델을 복원하는 '포토그래메트리'(Photogrammetry) 기술이 총동원된다.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가 축적한 자연 AI 프로젝트의 데이터는 무려 1억3천500만 장 규모에 이른다.
한국은 어떠한가. 국가 차원에서 'AI 3대 강국'을 외치며 모델 개발과 반도체 인프라에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지만, 그 모델이 무엇을 먹고 자랄지에 대한 논의는 한참 뒤처져 있다. K-팝, K-드라마, 한복, 단청, 사찰 건축, 한반도 생태 자료처럼 한국이 가장 잘 축적할 수 있는 '문화·자연 데이터셋'은 흩어져 있고, 그것을 정당한 사용 허가와 보상 체계 위에서 묶어내는 공공 인프라는 거의 부재하다.
AI 학습용 데이터의 출처와 권리문제로 작가와 기업, 플랫폼이 충돌하는 사례만 늘어날 뿐, 분쟁을 사전에 흡수할 제도적 그릇은 빈약하다.
데이터랜드의 진짜 교훈은 화려한 LNM의 시각 결과물이 아니라 그 모델의 '식단'을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점에 있다. 어떤 데이터를 어떤 방식으로 모았는지를 드러내는 일은 하나의 윤리 표어가 아니라, 작품의 미학적 권위와 기관의 사회적 신뢰를 동시에 떠받치는 구조물이다.
◇ 한국 디자인의 다음 과제는 '제도적 상상력'
데이터랜드는 그저 화려한 시각적 결과물만 제시하는 구조가 아니라, 어떤 데이터를 어떤 방식으로 투명하게 수집하고, 이를 어떻게 공공의 언어로 전환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제도적 실험의 장이다.
이제 질문은 우리나라로 향한다. 한국 디자인은 지난 20년간 도구적 활용과 시각적 완성도에서 세계적 수준에 올라섰다. 그러나 '무엇을 데이터로 삼을지', '누구의 권리를 보호할지', '어떤 기관이 이 흐름을 지속 가능한 문화 자산으로 끌고 갈지'에 대한 제도적 상상력은 아직 빈자리가 많다. AI 시대의 디자인 경쟁력은 더 이상 단일 작품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 작품이 기대고 있는 데이터·권리·기관·교육의 생태계 전체에서 판가름 난다.
이처럼 데이터랜드가 한국 디자인계에 던지는 화두는 분명하다. 다음 10년의 과제는 더 멋진 화면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 화면 뒤편에서 작동할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이미지의 화려함을 넘어 구조의 미래로, 한국 디자인이 시선을 옮겨야 할 때다. (2편에서 계속)
석수선 디자인전문가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박사(영상예술학 박사) ▲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기업 ㈜카우치포테이토 대표 ▲ 연세대학교 디자인센터 아트디렉터 역임 ▲ 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겸임교수 ▲ 한예종·경희대·한양대 겸임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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