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삶] "北핵엔 한마디 안하면서 원자력연구소장 책상위 걸터앉아 고성"

입력 2026-03-27 06:01:01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원전기술 자립노력에…반핵단체들, 반민족·반국가적 행위라며 시위"


"산업부·과기부 공무원들, 찾아오지 말라면서 갑자기 거리두는 행태"

"에너지 안보 중요한데, 모욕과 방해 많았다"…장인순 박사 인터뷰


[※ 편집자 주= 장인순 전(前) 원자력연구소장 인터뷰 기사는 분량이 많아 다섯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네 번째로 원자력 기술 자립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 등을 담았습니다. 다음 주 이후에 나가는 다섯번째 기사는 원전의 안전성 문제 등을 다룰 예정입니다. [삶]은 자서전적 인터뷰여서 개인의 성장 스토리와 사진 등이 들어갑니다. 이미 송고한 1∼3번째 기사의 요약은 이번 기사 맨 아랫부분에 수록했습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장인순 박사

[윤근영 기자 촬영]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반핵단체들은 원자력발전을 위해 밤새워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반국가적 행위, 반민족 행위를 한다면서 시위를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원자력연구소장으로 일할 때는 20여명이 소장실에 몰려와서는 내 책상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습니다. 내 의자에 앉아서는 빙빙 돌기도 했습니다. 고함을 지르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반핵을 외치면서 북한 핵무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핵탄두 장착 가능 미사일을 발사해도 침묵했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는 장인순 전(前) 원자력연구소장(86)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인터뷰는 세종시 전의면 유천리에 있는 전의마을도서관에서 지난 1월 24일부터 네 차례 진행됐다.


그는 인터뷰에서 "원자력 연구자들은 많은 수모를 당하고도 눈물겨운 노력을 한 끝에 원자력 기술 세계 1위를 달성했다"면서 "이는 한국의 에너지 안보와 국방력 강화에 크게 기여한다"고 했다.


장 전 소장은 "현재 대부분의 국가가 원자력 에너지 확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우리나라의 전체 전기 생산에서 원자력은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비중을 더욱 끌어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원자력 기술은 핵 잠재력이라는 점에서도 국가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면서 "우리가 핵무기나 핵 추진 잠수함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도 뛰어난 원자력 기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1940년생인 장 전 소장은 전남 남해안 돌산이라는 섬에서 성장했으며 여수중학교와 여수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귀국한 뒤 30년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했으며 1999년부터 6년간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그는 핵연료 국산화, 한국형 원자로 건설 등에 기여해서 한국 원자력의 대부로 불린다.


퇴직 후 사비를 들여 세종시 전의면에 전의마을도서관을 건립한 그는 도서관장으로 일하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원자력을 널리 알리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장인순 박사와 부인(작고)

[본인 제공]


-- 한국 정부의 부름을 받고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연구 여건은 어떠했나.


▲ 1979년 3월에 후배 연구원 6명과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간 연구비가 970만원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연구 장비와 문서 자료가 없는 게 문제였다. 사과 궤짝 위에 비닐을 씌워서는 실험대로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우리는 서울의 청계천 시장에 가서 중고 부품을 구입하곤 했다. 그곳에 가면 없는 것이 없었다. 가격이 정품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당일 구매가 가능했다. 청계천 시장의 덕을 본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많은 중소기업이 그곳에 와서 필요 부품을 사 갔고, 돈이 없는 학생들은 그곳 헌책방에서 책을 구입했다. 나는 청계천에 '조국 근대화비'를 세워야 한다고 서울시청에 건의한 적도 있다.


-- 연구원들이 쉬지도 못하고 일했다고 했는데.


▲ 연구원들은 1주일에 80시간 이상 일했다. 밤새워 일하고도 초과근로 수당이나 야근 수당을 요구하지 않았다.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 역시 일요일이 없었고, 연구소 생활 30년간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아내는 매일 오전 6시 30분에 식사를 준비해놨다. 그걸 먹고 오전 7시 30분에 출근하면 밤 11시까지 일했다. 이러니 아내는 저녁을 혼자 먹는 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미안한 일이었다. 아내는 3년 전 하늘나라로 갔다. 숙소 근처에 수목장을 했고, 매일 출퇴근 하면서 들른다. 아직도 아내의 카카오톡 계정은 살아 있는데, 내가 매일 메시지를 보낸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고 한다. 아내 생전에는 하지 않았던 말을 이제서야 하고 있다.


-- 크리스마스 때도 일했다고 하던데.


▲ 핵연료 국산화를 위한 실험을 진행할 때였다. 논스톱(nonstop)으로 데이터를 40일간 지켜봐야 했다. 2교대로 밤낮없이 작업해야 했는데, 예정대로라면 12월 20일쯤에 끝나야 했다. 그런데 중간에 에러(error.오류)가 생겨서 40일 일정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때 나는 연구원 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 남편이 크리스마스를 반납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다행히 부인들은 이해를 해주셔서 그 실험 작업은 무사히 완료할 수 있었다.


-- 본인은 아버지 제사에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 어느 날 큰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제사가 있으니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말씀이었다. 바빠서 못 간다고 했더니 형님은 화를 버럭 내셨다. 10년 만에 한국에 와서는 아버지 제사에도 안 오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당분간 군대에 간 사람으로 취급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내가 훈장을 받은 것을 알고 "자네가 그런 일을 하느라 그랬구먼"이라고 하셨다. 형님은 5년 만에 오해를 푸셨다.




해외 세미나에 참석 중인 장인순 박사

[본인 제공]


-- 외국에 가서 기술을 습득하느라 고생했다고 하는데.


▲ 다른 나라로부터 기술을 배우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은 핵연료 변환시설을 배우기 위해 연구원들과 함께 독일에 갔다. 우라늄 원석을 핵연료로 전환하는 여러 공정을 실행하는 시설이었다. 그런 곳에 가면 사진을 못 찍게 한다. 나는 연구원들에게 자세히 살펴보고 기억해야 하는 부위를 할당했다. 우리는 밤에 호텔로 돌아와서는 파이프의 사이즈(크기)와 앵글(각도) 등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밤새워 짜깁기 도면을 그렸다. 처음에는 부정확했다. 그렇지만 1주일만 이렇게 반복해서 수정해가면 완벽한 설계 도면이 완성됐다.


-- 기술 습득 과정에서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는데.


▲ 마치 구걸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해외 학회 등에 가서 자료를 부탁하면 중요한 자료는 안 준다. 쓸데없는 자료만 주니 우리로서는 참담했다. 우리 연구소 설계팀이 기술이전 계약에 따라 미국의 어떤 기업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계속 허드렛일만 시키고 기술자료를 안 줬다. 급기야 우리 기술팀 대표는 "이럴 거면 철수하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그제야 그들은 자료를 건네줬다. 우리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방식도 사용했다. 술자리에 데려가서는 "기술자라고 하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고 자극하면 상대방이 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술자나 과학자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이런 방식이 통하기도 했다.


-- 해외 학회에서 기술을 배우는 것은 어려울 듯한데.


▲ 외국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가면 주요 논문이 발표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연구원들에게 절대로 세미나 중간에 자리를 뜨지 말라고 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자료 하나라도 더 확보하는 것이 국민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했다. 일부 후진국에서 온 대표들은 자기 발표가 끝나면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저기 구경하러 다니기 때문이다. 학회에 가면 어떤 나라가 발전 가능성이 있는지가 대표들의 행태에서 드러난다.


-- 태평양에서 빠져 죽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뭔가.


▲ 원자력연구소 인력 40여명이 미국에 기술을 배우러 갈 때였다. 이들은 떠나기 전날 행사 식장에 모였는데, 누군가가 기술 획득 없이 올 거면 태평양에서 빠져 죽자고 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최선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기술을 습득하자는 결의였다.




부산 기장군에 있는 고리 1호기 원자력 발전소의 모습

고리 1호기는 1978년 4월 상업 운전을 시작했고, 2017년 영구 정지가 결정됐다.
[연합뉴스 사진]


-- 국내에서도 원자력 기술 자립 노력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는데.


▲ 엽전(한국인 비하하는 말)이 무슨 원자력 기술 자립이냐고 했다. 우리보다 훨씬 선진국인 일본도 자체 원자로(reactor)를 만들지 못하는데, 한국이 무슨 원자로를 개발하느냐고 했다. 핵연료 국산화에 대해서도 조롱했다. 국산 핵연료 때문에 원자로가 깨지면 너희들이 책임질 것이냐고 했다. 그냥 수입해서 쓰라고 했다. 우리는 오기가 생겨서 더욱 기술 자립에 집중했다.


-- 본인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해 아직도 화를 내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문 대통령은 원전의 상징인 고리 1호기 앞에 원자력 기술자들을 모아놓고 탈원전을 선언했다. 그건 잔인한 일이었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국무회의에서 발표했을 것이다. 원전에 피와 땀을 쏟은 사람들 앞에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원전을 위해 일해왔던 사람들한테 미안하다는 한마디는 해야 했다.


-- 문 대통령은 원전 수출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나.


▲ 해외에서 원전 세일즈(sales.판매)를 한 것은 맞다. 그런데 탈원전한 나라로부터 원전을 수입하려는 국가는 없다. 수십년간 핵연료를 제공받고 유지보수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데, 탈원전 국가로부터는 그런 애프터 서비스(After Service)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자력연구소에 있는 한강 이남 최대 태극기

이 사진은 2003년에 촬영된 것이다.
[연합뉴스 사진]


-- 당시 공무원들도 원자력 전문가들에게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 문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자 이전에 친하게 지냈던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부처의 공무원들이 우리를 멀리했다. 오지 말라고 하면서 만남을 거부했다. 공무원들은 소신이 없는 해바라기라는 것을 그때 확인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당시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 인프라가 무너졌다고 했는데, 무슨 이야기인가.


▲ 당시 원전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이 700개 정도 있었다. 이중 수백개의 기업이 문을 닫았다. 중소기업은 1년 정도만 일감이 없어도 버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백명의 연구인력이 원자력 분야를 떠난 것도 큰 손실이었다. 당시 중국은 우리 기술자들에게 연봉을 3배로 올려주고 5년을 개런티(보장)한다면서 유혹했다. 이는 한국 기준 월급을 15년 치 정도 보장한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중국으로 간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 원자력 인력이 중국의 유혹에 안 넘어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원자력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수모를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반핵단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우리를 괴롭혔다. 원자력 기술자들은 이런 고통을 애국심으로 승화시켰다고 본다. 내가 원자력 연구소장에 취임한 직후인 2000년에 대형 태극기를 연구소 앞에 게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그 태극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컸다. 특별 제작을 의뢰했는데, 당시 돈으로 100만원에 달했다. 처음에는 폭 12m에 달하는 태극기를 걸었지만 거센 바람 때문에 금방 손상됐다. 그래서 평소에는 9m짜리, 행사 때는 12m짜리를 게양했다. 나는 연구소의 어떤 행사가 있으면 그곳에 들러서 묵념하곤 했다.




400억달러 UAE 원전 수주에 환호

2009년 12월 27일 아랍에미리트가 발주한 총 400억달러(한화 47조원대) 규모의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를 수주하자 한전 본사 원자력사업처 UAE사업팀이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에서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 반핵 단체들 때문에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 원자력연구소 소장실에 수십명이 들어와서 고함을 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그들은 연구소 내에 있는 실험용 원자로를 문제 삼았다. 일부는 내 책상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고, 다른 사람은 내 의자에 앉아서 빙빙 돌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2천명 정도 있는데, 우리도 생명이 하나뿐이다.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는 사람들이다. 안전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 시위대가 던진 돌멩이에 맞았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 내가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건립 책임자로 일할 때였다. 한 섬마을에 들어가서 주민들을 만날 예정이었는데 시위대가 몰려와서 돌멩이를 던졌다. 우리 일행이 돌멩이에 머리를 맞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주민들과 회의를 못 하고, 돌아와야 했다.


-- 주민들이 돌을 던진 것은 아닌가.


▲ 폐기장이 예정됐던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우리가 만나려는 주민은 인근의 섬 사람들이었다. 그 주민들은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다. 돌을 던진 시위대는 반핵단체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 방폐장은 다른 지역에 건립됐다. 황당한 것은 반핵단체 사람들이 주민들에게 "일단 반대 시위를 해라. 그러면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면서 시위를 부추기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 결국 원자력 기술 자립에 성공했는데, 감회가 어떤가.


▲ 2009년 12월 한국이 아랍에미리트에 원전을 수출할 때 감격이 벅차올랐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아랍에미리트 국왕이 입회한 가운데 양국 관련 공사 사장이 계약서에 사인하는 장면이 TV로 생중계됐다. 나는 그걸 보고는 엉엉 울었다. 그동안 받은 설움과 수모, 동료들의 고생 등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내는 어른이 운다면서 흉을 봤다. 그날 나는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그 감격을 글로 작성했다. 나는 "오늘이 원자력 기술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날"이라고 적었다.


(인터뷰 4차 기사 끝)




UAE에 한국형 원자력발전소 첫 수출 성공

2009년 12월27일 김쌍수(왼쪽) 한국전력공사 사장과칼둔 무바락 UAE 원자력공사 사장이 아부다비 아랍에미리트 펠리스 호텔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칼리파 빈 자예드 알 나흐얀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원전사업 주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인터뷰 1차 기사 요약>


[삶] "미국은 한국없이 원전 못짓지만…한국은 미국없이 짓는다"(2월5일)


한국의 원전 건조 능력은 세계 1위다. 시공, 원자로 설계, 운전 능력 등에서 한국을 따라올 나라는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밤새워 실험하고 개발했다.


미국은 전력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원전 수백기를 추가로 지을 계획인데, 한국의 도움 없이는 지을 수 없다. 유럽 각국도 원전을 지을 예정이어서 한국 원전 수출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전기 생산에서 원자력의 비중은 30% 정도인데, 50%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전기 요금이 떨어져서 서민들의 가계 부담이 줄어들고, 조선업을 비롯한 기업들은 비용 절감으로 수출경쟁력이 한층 더 올라간다.


다시는 탈원전으로 가서는 안 된다. 원자력에 연구개발(R&D) 투자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의 수명도 연장해야 한다. 미국은 원전을 80년 정도 사용하는데, 우리는 40년도 못 쓰고 폐쇄한다.


원전의 안전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은 1978년 고리원전 1호기 가동을 시작한 이후 많은 원전을 운영해왔지만, 한 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다.


< 2차 기사 요약>


[삶] "핵무기 제조는 휴대폰보다 훨씬 쉽다"…원자력 대부 장인순(2월24일)


핵무기 제조 기술은 하이테크가 아니다. 80년이나 된 과거의 기술이다.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원자로 제조보다 쉬운 일이다. 원자로에 100만개의 부품이 들어가지만, 핵무기에는 2천개도 안 들어간다.


핵무기 제조는 휴대전화보다도 훨씬 쉬운 기술이다. 한국이 핵무기 제조를 시도하지 않는 것은 국제사회와의 약속 때문이다. 이것이 북한과 다른 점이다. 우리는 리는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다.


현재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 중동, 동남아 국가 등 세계 각국이 원자력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원전 기술을 발전시켜온 덕분에 세계 원전 1등 국가가 됐다.


한국이 국제사회와의 약속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지는 않지만, 군사 강국들이 많은 동북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핵무기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원전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키는 것이 그 잠재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원자력 기술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3차 기사 요약>


[삶] "한국, 핵추진 잠수함 홀로 충분히 만든다…북한은 기술 없어"(3월7일)


한국은 원자로 1등, 선박 1등 국가다. 한국은 원자력 잠수함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나라다. 북한은 그런 능력이 되지 않는다. 러시아 등 다른 나라의 지원 없이는 만들지 못한다.


핵 추진 잠수함은 국가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 오랫동안 바닷속에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국의 해안선 근처까지 몰래 가서 근접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니 적군에게는 큰 위협이 된다.


국가는 당연히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국방력을 갖춰야 한다. 그 차원에서도 원자력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 원자력 발전에 가장 기여한 분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분은 1971년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공사를 시작했다. 건설비는 당시 정부 1년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당시 어떤 사람들도 그걸 찬성하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은 결국 원자력 시대를 열었다.


그다음에 한국 원자력 발전에 기여하신 분은 이승만 대통령이다. 그분은 1959년에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1백여명을 미국에 보내서 공부하도록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였던 시절이었으니 당시 한국은 후진국 중 후진국이었다. 이 대통령이 혜안을 가졌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keunyoung@yna.co.kr



인기상품 확인하고 계속 읽어보세요!

5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연합뉴스 콘텐츠 더보기

해당 콘텐츠 제공사로 이동합니다.

많이 본 최근 기사

관심 많은 기사

실시간 검색어

2026-03-27 08:00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