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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즈 1세대 보컬리스트가 40년간 지킨 원칙
"한국 것 못하면서 외국 흉내 내는 건 재즈 싱어로서 실패"
미 셔플 리듬과 한국 전통 장단 결합한 '셔플모리' 선보여…트로트 재즈 편곡도

(서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최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연합뉴스에서 인터뷰하는 한국 재즈 1세대 보컬리스트 윤희정. seva@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재즈라고 생각해요. 한국 사람이 한국 것을 못 하면서 외국 흉내를 내는 것은 재즈 싱어로서 실패한 거예요."
한국 재즈 1세대 보컬리스트 윤희정이 최근 연합뉴스와 만나 40년 넘게 무대를 지켜온 철학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K팝과 K드라마를 넘어 한국의 다양한 문화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지금, 그는 일찌감치 한국 전통 장단과 재즈를 융합한 독자적 리듬을 개척하며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믿음을 실천해 왔다.
윤희정은 K컬처의 확산을 두고 "새로운 문화 현상이 생겼다"고 했다. "영어가 아닌 한국말에 모든 사람이 열광한다. 옛날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며 BTS, 싸이, 블랙핑크, 지드래곤을 언급했다. "걸어가는 게 다 돈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라며 글로벌 파급력에 감탄했다. 외국 유학 없이 스승 이판근 선생으로부터 음악을 배운 그는 "항상 한국 사람이 한국 것을 못 하면서 외국 흉내를 낸다. 그거는 재즈 싱어로서 실패한 거다"라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모녀가 재즈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윤희정(왼쪽) 재즈 보컬리스트와 싱어송라이터 딸 김수연씨. [윤희정 제공]
그 실천이 바로 '셔플모리'다. 미국의 셔플 리듬과 한국 전통 장단인 자진모리·중중모리·휘모리를 결합한 독창적 폴리 리듬이다.
"4박자짜리 셔플에 4개, 3개, 6개를 같은 타이밍에 한꺼번에 들리게 하는 폴리리듬"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아프리카에도 비슷한 리듬이 있을 만큼 원초적인 생명력을 가진 이 리듬은 그의 데뷔곡 '세노야'에도 적용됐다.
처음엔 거부감도 있었다. "드레스 입은 여자한테 꽹과리를 치라고 해서 선생님을 미워했다"는 윤희정은 "지금 그걸로 돈을 벌잖아요. 그렇게 잘 어울리는 거예요"라며 웃었다.
현재 그는 마라카스, 귀로, 콩가, 봉고 등 손 악기 열몇 개를 다루며 노래한다. 무대에서의 악단 소개도 셔플모리 리듬에 맞춰 각 연주자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요. 저만의 아이디어고 아무도 할 수 없는 거죠."
재즈의 즉흥성에 대한 그의 시각도 독특하다. 무대 위에서 연주자들 사이의 눈빛 교환, 이른바 '스테이지 컨택'으로 순간순간 음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재즈의 진수라고 했다.
"트럼펫을 불었는데 그 라인이 싫으면 피아노한테 줘요. 내 맘에 드는 애드리브가 나왔을 때 오케이 사인을 주면 테마로 다시 들어가고. 이런 게 재즈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거죠."
다만 청중과의 균형도 중요하다. "즉흥연주를 너무 많이 하면 관객이 나가요. 그 균형을 한 40년 하다 보니 알게 됐죠."
마일스 데이비스의 말을 그는 좌우명처럼 인용했다. "재즈는 틀린 음이 없어. 단지 중요한 것은 그 음을 어떻게 이어가냐는 거야." 그러면서 "하루 연습을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을 안 하면 관객이 알고, 사흘을 안 하면 재즈를 그만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전통 음악과의 접목은 자진모리·셔플모리에 그치지 않는다. 약 15년 전부터 이미자의 '아씨' 등 트로트 곡 약 30개를 재즈로 편곡하는 작업을 해 왔다.

윤희정 재즈 보컬리스트의 서울 서초구 반포동 연구실에는 피아노, 드럼, 콩가 등을 비롯한 각종 악기로 채워져 있다. 이 공간에서 그는 곡 작업과 연습을 하고 '프렌즈'들의 재즈 레슨도 진행한다. [윤희정 제공]
"어차피 재즈는 편곡의 예술이거든요. 똑같은 거는 세상에 하나도 없으니까 제 나름의 버전을 만들었죠."
26년째 진행 중인 크리스마스 다이닝 공연에서 청중의 요청으로 현철의 '아미새'를 블루스로 편곡해 선보인 것도 그 연장선이다.
"박수가 가장 많이 나온 것도 바로 그런 곡들이에요. '재즈로 편곡하니까 저렇게 되는 거야'하는 카타르시스를 주는 거죠."
재즈 대중화를 위한 교육 프로젝트도 오래됐다. 스승 이판근이 만든 'CEOJ(Co-Eutainment of Jazz)' 밴드를 이어받아 30년째 운영하며 2013년부터는 '재즈 프렌즈 파티'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재즈 두 곡을 3개월간 가르치는 마스터 클래스를 이어 오고 있다.
"지금까지 약 400명을 가르쳤는데 모두 다 행복해해요. 두 곡을 하면 세상을 얻은 것 같다는 사람도 있대요."

(서울=연합뉴스) 김연정기자 = 2007년 1월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여성의 집짓기 후원을 위한 2007 한복패션쇼'에서 재즈가수 윤희정이 모델로 섰다.
maum@yna.co.kr
그는 "맛을 봐야 맛있다는 걸 알지, 재즈도 맛을 봐야 한다"고 했다.
영어 재즈곡에 한국어 가사를 붙이는 작업도 진행해 왔다. "'The Very Thought of You' 같은 노래도 몇 마디만 한국말로 하면 다 영어로만 할 때는 잘 모르던 청중이 '저런 노래구나' 하고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음악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AI가 만든 노래를 들어봤다며 "잘하는데 뭔가 허전한 거야. 휴먼이 없다"고 했다.
"조합은 딱 나올 수 있어도 단 한 개도 똑같은 게 없어야 재즈"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재즈의 즉흥 연주 원리와 AI 거대 언어 모델(LLM)의 작동 방식이 닮았다는 지적에는 "맞네, 텔레파시야"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끝까지 휴먼은 없을 것 같은데"라고 선을 그었다.

1972년 발매된 윤희정 2집 '지다남은잎새'(왼쪽·아세아레코드사)와 1975년 제작된 3집 '쉽지않아요/물레방아'(오아시스). [윤희정 제공]
"음악은 영혼의 복사본이에요. AI는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소울까지 복사는 못 하는 거죠."
음악 후배들에게 건네는 말에도 40년의 무게가 담겼다. "경쟁이 아니다. 음악은 듣기 싫거나 듣기 좋은 것 두 개밖에 없어. 이 세상에 그 많은 음악가들이 있는데 너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네 거를 찾아라."
스승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는 말도 전했다.
"호랑이를 그려라. 고양이부터 그리면 쥐밖에 안 되니까. 되든 안 되든 호랑이부터 그려서 고양이를 만들라."
어떤 아티스트로 남고 싶으냐는 질문에 윤희정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윤희정 같은 싱어가 되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 좋겠고, 조금 더 먼저 재즈를 몰랐던 걸 후회한다는 말도 하고 싶어요. 그냥 열심히 하는 싱어로 남고 싶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재즈를 선택하게 된 건 윤희정 인생의 행운이었어요."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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